안동지방엔 놋다리밟기라는 민속놀이가 있다.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왔을 때 마을 여자들이 차가운 물에 젖지 않도록 인간 징검다리가 되어 준 것이 그 유래라고 한다.
우리 5천년 역사를 가장 압축해 놓은 시대라면 고려 31대 공민왕의 재위기간이 아닐까 한다. 일찌기 원나라로 불려 가서 왕 수업을 마치고 원의 황족 여자와 결혼까지 한 후 고려왕으로 책봉되어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공민왕은 즉위 후 곧 바로 배원정책을 실시했다. 물론 원이 쇠약해진 탓도 있지만 국제정세의 변화를 틈타 민족의 자주화 정책을 도모했던 것은 그의 비범한 신념과 기개의 발로였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엔 국내외의 만만찮은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략에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중앙 조정에는 기철을 필두로 한 친원파의 저항도 거셌다. 노국공주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졌을 때 국정을 맡은 신돈의 실정으로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공민왕은 재능이 많은 왕이었다. 특히 북종화의 대가로서 그가 그린 청산대렵도는 아직도 남아 있다. 암튼 이 땅에서 원의 잔재를 청산한 공민왕의 개혁이 없었다면 조선의 건국과 우리의 고유한 민족문화의 창달은 어려웠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북미회담만 바라보고 있지 않겠다'는 말을 여러차례 했다. 세상에 공짜점심이 있었던가? 대통령이 고독해서는 안 된다. 이 땅의 역사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14일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을 보면서 공민왕이 새삼 오버랩되는 것은 기자만의 것일까. 사진은 개성에 있는 공민왕릉이다. 평생 사랑한 노국공주를 죽어서도 찾아 간 그는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다. 개성 관광길이 다시 열리면 꼭 찾아 보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