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엔 너른 평야가 있다. 백제는 고구려 남하에 밀려 차령산맥 이남 공주로 도읍을 옮기고 다시 부여로 내려 왔다.
당시 논산은 그 백제국의 중요한 곡창지대였다. 서기 660년 계백은 김유신 장군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을 5천 결사대로 맞서며 이 근처 황산벌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다.
아들뻘 쯤 돼 보이는 어린 신라 화랑(관창)을 몇 번이나 잡았다 풀어 주었다. 그는 망해 가는 나라를 위해 싸우면서도 우리 전사의 로망을 남겼다. 계백의 묘는 논산 황산벌 양지 바른 야산에 있다.
앞에는 탑정호가 펼쳐져 있고 주변에는 소나무 숲이 그의 무덤을 지켜 서 있다. 그야 말로 삼국사기 백제편이 논산의 광활한 대지 위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논산을 지금도 놀뫼라고 한다. 황산벌의 '황'은 '놀'의 한자 표기였던 것 같다. 황토가 많아 누를 '황'이라 부른 듯도 하지만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워 놀뫼의 '놀'은 노을의 의미였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벌판이 너른 데도 '뫼'라고 한 이유도 짐작이 된다. 지명은 생활 근거지를 나타낸다고 볼 때 옛사람들은 들보다는 산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산은 바람을 막아 준다. 나무가 많으니 건축자재나 땔깜 구하기도 수월하다. 산에서 내려 오는 물은 식수로도 적합하다. 그러니 보통 자연촌락들은 들판보다 산 아래에 많이 형성돼 있었다.
논산의 주요 지명으로 은진, 노성, 연산 3개만 외워도 논산의 역사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세 지명은 조선시대에 논산에 있었던 3개 현의 이름이다. '논산'은 일제 강점기 때 지명이라 조선스러운 맛은 덜 하지만 이젠 논산 훈련소 등으로 너무 익숙해졌다.
논산은 문화유산이 빼곡한 고장이다. 역사도 깊지만 조선시대 예학의 본산으로 역사에 대한 대단한 취미가 아니라면 문을 열기도 쉽지 않다.
암튼 논산은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와 함께 우리 성리학의 양대 주류였던 기호학파의 거두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다. 논산은 고려 태조 왕건이 신검의 항복을 받아 후삼국의 통일을 이룩한 통일의 성지이기도 하다.
후백제 견훤왕의 묘가 있가 있으며 은진미륵이 유명한 고려 사찰 관촉사 등이 아직 남아 있는 역사적 도시이다.
논산시는 일제에 의해 말살되었던 우리 역사의 복원에 힘 쓰고 있다. 아울러 수도권과 호남지방을 잇는 가교적 위치에 있기도 하다. 골고루 다 잘 사는 나라를 원한다면 논산이 활짝 웃는 날이 우리 나라가 웃는 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