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이 29일 본회의에 상정된 모든 법률안들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이에 따라 이날 예정됐던 각종 비쟁점 민생 법률안들의 국회 본회의 통과도 무산됐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오후 3시쯤 국회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오늘 본회의에 상정된 모든 법안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이번 정기국회가 끝날 때(12월 10일)까지 이 필리버스터는 국회법에 따르면 계속 될 수 있고, 저희는 그렇게 할 것”이라며 “국회의장께 제안한다. 선거법을 상정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저희가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법안에 앞서서 민식이법 등에 대해서 먼저 상정해 통과시켜 줄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공수처는 이 정권의 추악한 비리와 부패를 덮고 ‘친문무죄, 반문유죄’ 사회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권의 공포 수사처일 뿐이다. 반대파를 탄압하고 국민 저항을 봉쇄해 대한민국을 침묵과 굴종의 사회로 만들 것”이라며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대한민국을 망치려는 포퓰리즘 세력의 야합 선거제일 뿐이다. 굴종적 대북정책과 한미동맹 파괴의 안보파탄 세력, 재정만능주의와 반시장주의에 빠진 경제 황폐화 세력,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미래를 착취하는 무책임 세력, 관권선거 개입을 획책하는 것도 모자라 정체불명의 위헌적 선거제도를 만들어 장기독재를 꾀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 원내대표는 “이제 자유한국당이 자유민주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저항을 할 수 있는 저항의 시간이 됐다”며 “그 저항의 시간을 불법적으로 더 이상 막지 말고 이 부분에 대해서 응답해주실 것을 말씀드린다”고 덧붙였다. 자유한국당은 199건의 법률안들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현행 국회법 제106조의2는 “의원이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에 대하여 이 법의 다른 규정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토론을 하려는 경우에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서명한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며 “이 경우 의장은 해당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 토론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국회법 제73조에 따르면 본회의는 재적의원 5분의 1 이상의 출석으로 개의한다.
하지만 문희상 국회의장은 이날 국회 접견실에서 여야 3당 교섭단체(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를 만나 “오늘 안건이 200건 가까이 되는데 의결정족수가 필요한 안건들”이라며 “본회의에서 의결정족수가 되면 언제든 개의하고 사회를 보겠다”고 말했다. 현행 헌법 제49조는 “국회는 헌법 또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 국회 재적의원은 295명이다. 문희상 국회의장의 국회 본회의 개의 기준을 충족하려면 148명 이상의 국회의원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 수는 108명이다.
이에 따라 이날 국회 본회의는 열리지 못했다. 이에 앞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여상규)는 이날 전체회의를 열어 ‘민식이법’으로 불리는 ‘도로교통법 일부개정법률안’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
‘도로교통법 일부개정법률안’의 주요 내용은 어린이 보호구역에 무인 교통단속용 장비, 횡단보도 신호기 등 어린이 안전을 위한 시설·장비를 우선적으로 설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의 주요 내용은 자동차 운전자가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어린이를 사상에 이르게 한 경우 가중처벌한다는 것이다.
유치원 3법인 ‘유아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 ‘사립학교법 일부개정법률안’, ‘학교급식법 일부개정법률안’도 이날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민식이법 등의 당사자들인 부모들은 이날 국회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일제히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의 이름을 딴 법안들을 사실상 협상카드로 사용하려 한다”며 “오늘 나 원내대표 기자회견을 들으면서 ‘우리가 그러면 더불어민주당에 가서 무릎을 꿇길 바라시는 건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며 자유한국당을 강하게 비판하며 나경원 원내대표의 사과를 요구했다.
정치권은 일제히 자유한국당을 맹비난했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일동은 이날 발표한 ‘자유한국당 필리버스터 중단 촉구 규탄문’에서 “지금 의회민주주의를 짓밟고 절체절명의 위기로 내몰고 있는 것은 바로 자유한국당이며, 국민의 분노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것”이라며 “자유한국당은 민생ㆍ경제법안을 볼모로 삼은 의회민주주의 파괴 폭거를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 촉구하며 명분 없는 필리버스터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정의당 오현주 대변인은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 설치법안의 패스트트랙을 저지하는 데 민생을 볼모로 잡겠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들의 서슬 퍼런 분노에도 불구하고 유치원3법을 끝까지 막겠다는 것”이라며 “자유한국당은 대표와 원내대표가 서로서로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을지 경쟁하고 있는 것인가. 차라리 이럴 거면 의원직에서 총사퇴하라!”고 말했다.
대안신당(가칭) 최경환 수석대변인은 “자유한국당의 행태는 국정을 마비시키는 헌정파괴 수준의 거대야당의 횡포다. 민생을 볼모로 한 국정파괴 행위”라며 “한국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에 4+1 협상을 통해 무제한토론 종결 동의안을 함께 제출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민주평화당 박주현 수석대변인은 “민생을 외면한 자유한국당의 만행을 규탄한다”며 “자유한국당은 국민을 대변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바른마래당 김정화 대변인도 “어린이 교통안전 강화를 위한 민식이법까지 '당리당략을 위한 제물'로 삼겠다는 상식 파괴의 자유한국당”이라며 “이쯤 되니 자유한국당에 묻고 싶다. 정당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오후 5시 30분쯤 국회에서 한 기자간담회에서 “정말 민주당의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국회의장은 어떻게 법에 보장된 소수당의 권리를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가”라며 “민식이법 등 주요 민생 법안들은 우리가 필리버스터 한 법안의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나 원내대표는 “국회의장님께 ‘우리는 필리버스터를 모든 법안에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늘 필리버스터를 시작해서 10일 정기국회까지 저항의 시간만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니 의장께서 선거법을 상정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시겠냐’ 했더니 의장께서 오늘 선거법 상정 안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며 “의장께서는 ‘여야 원내대표들이 합의를 해봐라’ 그러셔서 제가 ‘민생법안을 먼저 처리하고 그 다음에 우리 필리버스터 권한을 보장해 달라’고 했다. 당연히 소수당에 보장된 권리”라고 말했다.
이어 “그랬는데 민주당에서 ‘필리버스터 철회하지 않으면 민생법안 처리 못 하겠다’고 했다”며 “그래놓고 지금 규탄대회를 했다는 말에 제가 정말 ‘이런 적반하장이 있냐’하는 말이다”라고 비판했다.
자유한국당 이만희 원내대변인은 “결국 민주당과 국회의장이 민생도, 국회법도 무시하면서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만 해야 겠다는 독재 본성을 드러냈다”며 “자유한국당이 국회법에 보장된 무제한 토론, 즉 필리버스터를 신청하자 민주당과 국회의장이 본회의 개의 자체를 거부하는 희대의 민생 파괴, 국회 파괴를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만희 원내대변인은 “자유한국당은 ‘민식이법 등 시급한 민생 법안을 우선 처리한 후 국회법에 따른 합법적 필리버스터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며 “그런데도 민주당은 법에 보장된 정당한 권한마저 무시하며 필리버스터 철회를 요구하며 국회 본회의 개회를 거부하고 있고, 문희상 국회의장도 이에 동조해 재적의원 5분의1 이상이 출석하면 본회의를 개의하도록 한 국회법까지 무시하며 ‘의결정족수를 채워야 개의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원내대변인은 “민주당과 국회의장이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두려워한다면 지금이라도 민생 입법을 위해 즉각 국회 본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