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생산기업에 미국산 첨단 반도체 장비 판매를 금지하는 내용의 대중국 수출 통제 조치를 전격 발표했다. 미국이 일개 기업이나 장비가 아닌 한 국가의 특정 산업 전반에 대해 수출 통제 조치를 취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조치가 시행되면 중국내 생산기지를 둔 삼성전자, 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생산기업들의 생산 및 수출 활동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일단 “국내 산업계에 미칠 영향은 전반적으로 제한적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8일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 강화 조치와 관련해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 공장을 운영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에 대한 반도체 장비 공급은 큰 지장이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산업부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지난 7일(현지시간) ▲특정 첨단 컴퓨팅 반도체 및 수퍼컴퓨터용 반도체칩 등에 대한 제한적 수출 통제 ▲특정 반도체 제조 장비에 대한 새 수출 통제 방침을 발표했다. 미국 기업이 특정 수준 이상의 칩을 생산하는 중국내 기업에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를 판매할 경우 별도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특정 수준 이상’의 구체적인 기준은 ▲18nm(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 플래시 ▲핀펫(FinFET) 기술 등을 사용한 로직칩(16nm 내지 14nm) 등이다. 미국 기업이 이 기준을 초과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장비·기술을 중국에 판매하려면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 특히 중국 내 생산시설이 중국 기업 소유인 경우 이른바 ‘거부 추정 원칙’이 적용돼 수출이 사실상 전면 금지된다.
미국은 이번 조치를 통해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의 중국 판매를 전면 제한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처럼 중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을 소유한 외국 기업에 대해서는 일종의 예외 규정을 둬 개별 심사를 거쳐 판단하기로 했다고 산업부는 전했다.
산업부는 “중국에서 가동 중인 SK 우시공장과 삼성 시안공장 등은 중국 기업과 달리 ‘사안별 검토대상’으로 분류돼 장비 공급에 큰 지장은 없을 전망”이라며 “이를 통해 현재 운영 중인 공장의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필요한 장비의 안정적인 공급을 보장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중국 내 한국 반도체 공장들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감안해 미국 측이 별도의 예외적인 허가 절차를 도입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도 “미국 수출통제 당국과의 협의를 통해 불확실성을 최소화할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산업부는 국내 반도체 산업 전반에 미칠 영향과 관련해서도 “첨단 컴퓨팅 칩은 국내 생산이 없어 단기적 영향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중장기적 관점에서 우리 인공지능(AI) 기업의 해외시장 진출 등 제한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산자부는 이에 따라 오는 13일(현지시간) 미 상무부 설명회와 60일 의견수렴(public comment) 절차 등에 적극 참여해 우리 업계의 의견을 추가로 개진하고 관련 규정에 대한 유권해석 등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또 조속한 시일 내 ‘한-미 수출통제 워킹그룹’을 개최해 기업 애로사항 등을 집중 협의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중국은 미국에 조치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류펑위 주미 중국대사관 대변인은 통제조치가 발표된 당일 “미국이 자국의 기술력을 이점으로 삼아 신흥시장과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저해하고 억제하려 한다. 미국은 중국과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영원히 공급망의 최하단에 머물기를 희망한다”고 비판했다.
중국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는 9일 “미국의 수출통제 조치는 비(非)미국 기업으로 제한범위를 대폭 확대해 중국과의 정상적인 협력과 무역을 막으려는 의도”라며 “자유무역에 대한 야만적 일격으로, 중국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이 이성을 잃었다”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시장으로 “중국 시장과의 단절은 ‘상업적 자살’(商業自殺)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