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식의 '클래식은 영화를 타고' 21017] 버드맨 - Birdman :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이충식의 '클래식은 영화를 타고' 21017] 버드맨 - Birdman :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 이상호 기자 sanghodi@hanmail.net
  • 승인 2021.08.04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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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추락을 통해 새로운 비상(飛翔)을 꿈꾸는 이카루스의 매혹적인 서사 < 버드맨 > 이 있습니다.

영화는 레이먼드 커버의 시(詩) 'Late Fragment' 중 몇 구절,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유성처럼 보이는 물체 등 온통 암유적인 이미지와 함께... 안토니오 산체스의 진중한 드럼 스코어를 배경으로 그 막을 열어가죠. 

그리고 곧바로 주인공 리건 톰슨(마이클 케인 분)이 방 안에서 가부좌를 튼 채 공중부양하는 모습이 조명됩니다.

벽에는 ‘버드맨’ 포스터(관객 눈에는 영락없이 ‘배트맨’ 사진)가 붙어 있죠. 한데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건 우리 귀에 익숙한... 다름 아닌 ‘배트맨’ 전매 특허의 에코 강한 저음이죠.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지? 여긴 정말 끔찍해. 거시기 냄새가 진동하잖아. 우리가 있을 곳은 이 시궁창이 아니야!"

'전직 액션 슈퍼 히어로'... 왕년에 프랜차이즈 영화 '버드맨 시리즈' 로 스타덤에 올랐던 주인공 리건 톰슨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수식어죠. 

하지만 많은 스타들이 그렇듯... 빠르게 잊혀진 배우로서 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오직 '버드맨' 으로 돌아오느냐 마느냐일 뿐입니다. 

이제 그는 할리우드의 상업적 영화를 떠나 브로드웨이에 진출함으로써 자신의 새로운 커리어, 곧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갖게 되길 원하죠.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성공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린 리건은 계속해서 버드맨의 환청에 시달리죠.

리건은 레이먼드 카버의 <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 을 원작으로 한 연극을 각색, 제작하고, 그 자신이 주연까지 맡아 다시금 대중의 주목을 받길 갈망하지만... 상황은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배역 소화를 제대로 못해 무던히도 속을 썩이던 배우 랄프(제러미 셰이모스 분)는 추락한 무대조명 장치에 맞아 그만 실려 나가죠.

대역으로 긴급 투입된... '문화를 말살해 영화를 싫어한다' 는 연기파 메소드 배우 마이크(에드워드 노튼 분)는 제멋대로인 통제 불능의 나르시스트로, 리건의 혼을 쏙 빼놓는 건 물론, 배우로서의 그의 입지 까지 위협합니다. 

제작자이자, 변호사인 친구 제이크(자흐 갤리피아니키스 분)는 돈이 바닥났다며 노심초사하죠. 

약물중독으로 재활치료까지 받은 딸 샘(엠마 스톤 분)은 공연을 함께 준비하며 다시 약에 손을 댑니다.

왠지 적대적인 비평가
타비사(린제이 던컨 분) 또한 ‘근본 없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리건이 연극을 올리는 것을 탓하며 펜으로 그를 무너뜨리겠다고 공언하죠.

게다가, 흥청망청했던 결과로 통장도 비어 딸에게 물려주기로 되어 있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죠. 점차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자신을 바라볼 자신이 없는 겁니다. 

그렇게 잊혀지는 것은 곧 죽음이라 여기는 리건... 자신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자아 버드맨은 끊임없이 그를 향해 "찬란했던 우리들의 시대로 다시 돌아가자" 라고 꼬드깁니다.

안타깝게도 그럴 순 없죠. 이미 육체적인 매력을 잃어버렸기도 했지만,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열망 때문이기도 합니다.

리건은 분장실에서 "모든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빛난다"라고 적혀있는 메모를 발견하지요.

그럼에도... 명성에 집착하는 리건은 타인의 판단에 매달립니다. 그렇기에 '버드맨' 이라는 또 다른 자아에게 '태움' 에 가까운 '갈굼' 을 당하고, 연극이 실패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죠.

잃어버린 꿈을 되찾기 위해 새롭게 날아오르고 싶은 리건... 하지만 가시밭길의 연속으로, 세 번의 프리뷰 공연 동안 계속해서 불안한 해프닝들이 벌어집니다. 

연극 도중 실제로 술을 마셔버린 마이크는 리건의 멋진 대사를 망쳐버린데다, 침대장면에서 실제로 상대역 레슬리(나오미 와츠 분)에게 섹스 행각을 시도하는 만행을 저지르죠. 

급기야, 마지막 프리뷰 공연 중 샘이 마이크와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선 착잡한 마음에 담배를 태우러 극장 밖 뒷문으로 나가던 리건은, 갑자기 문이 잠기더니 하필 가운마저 문에 끼여버리는 참사를 당하고 맙니다.

자신이 등장해야 하는 장면이 임박한 리건은 어쩔 수 없이 가운을 벗고 팬티만 입은 채, 타임스 스퀘어 군중 속을 헤치며 공연장 주변을 한 바퀴 돌아 극장 안으로 가까스로 들어가죠.

그는 소품과 의상도 없이 속옷 차림에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관객석에서 대사를 시작해, 겨우 겨우 연극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 https://youtu.be/3hBuTNtIwUQ

- https://youtu.be/KjTDzWPMWzA

다음날 리건의 스트리킹 사진은 가십 뉴스의 헤드라인을 도배하죠.

리건은 바에서 우연히 마주친 절대적인 영향력의 연극 평론가 타비사와 애써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는 최악의 혹평을 공언합니다. 

리건은 가치 있는 작품을 할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다며, 원초적으로 적대적인 타비사를 향해 분노어린 속내를 퍼부어대죠.

"당신은 머릿속에 있는 하찮은 소음들을 진정한 지식과 혼동하고 있는 거라고. 더 쓰레기 같은 비교로 뒷받침된 쓰레기 같은 의견 더미일 뿐이지. 난 뭣같은 배우지만 이 연극에 내 모든 걸 걸었어!"

하지만 냉혈한(冷血漢) 타비나는 가혹하게도 리건의 가슴에 결정적인 비수를 꽂습니다.

"당신은 배우가 아니야, 그저 연예인일 뿐이지. 그 점을 분명히 하자고. 난 당신의 연극을 죽여, 묻어버릴 거야!"

절망한 리건은, 한 취객이 "인생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 찼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며 주절대는 '맥베스' 대사를 뒤로 한 채... 한동안 끊었던 위스키를 병째 들이키죠. 

다음날 아침거리에서 초췌한 몰골로 깨어난 리건 앞에 버드맨이 환청이 아닌, 실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버드맨은 "이제 연극 따윈 집어치우고, 우울한 철학도 잊어버리자" 라며, 어서 할리우드로 컴백해 <버드맨 4> 를 찍자고 부추기죠.

갑자기 거리 풍경은 포탄이 날아들며 특공대가 조류 로봇과 싸우는 블록버스터 상황으로 바뀝니다. 

순간 리건은 멋지게 날아오르지만... 찬바람 부는 옥상 난간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죠.

버드맨은 포효합니다. "바로 그거야! 넌 '버드맨' 이야, '신' 이라고. 네가 있을 곳은 바로 여기야. 세상의 모든 위!"

"사랑받지 못하니, 나는 존재하지 않아" 라고 되뇌던 리건... 그는 마침내 옥상에서 훌쩍 뛰어내려 창공을 향해 훨훨 날아갑니다.

그러곤 마치 부활한 슈퍼  히어로처럼 뉴욕 시내 빌딩 숲 사이를 멋지게 유영하더니, 레이먼드 카버의 연극 포스터가 걸려있는 공연장 앞에 사뿐히 내리죠.

인터미션 중 잠시 휴식을 취하던 리건은 격려차 찾아온 전처 실비아(에이미 라이언 분)에게,

외도를 들킨 날 말리부 해변에 자살하려고 들어갔다가 '해파리' 에게 쏘여서 실패했던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러면서 "이 연극은 무언가를 제대로 해볼 절호의 기회야" 라고... 마치 유언처럼 말하죠. 

실비아가 객석으로 돌아간 뒤 리건은 '실탄이 든 자동권총' 을 꺼내들고서 무대에 오릅니다.

이어 '실탄이 든 자동권총' 을 꺼내들고서 무대에 올라 연기가 아닌 실제 상황처럼 느껴지는 대사를 내뱉더니 자신의 머리에 진짜로 총을 쏴버립니다. 

관객들은 잠시 정적에 휩싸여 있다가 이것도 연기(?)라 생각하곤 환호하며 기립 박수를 보내죠.

잠깐의 영상 몽타주가 지나간 뒤... 병원 시퀀스로 이어진 화면은, 천만다행으로 뇌 쪽이 아닌 코를 쏴서 살아남은 리건을 조명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리건을 그렇게도 못죽여 안달했던 타비사가 뉴욕타임스에 "연극계의 동맥에서 사라졌던 피를 흘렸다. 극사실주의 장르의 개척" 이라는 대호평을 남기죠.

덕분에(?) 수많은 대중들이 리건의 쾌유를 위해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는 등 세상은 새로운 예술가의 탄생에 열광합니다.

딸 샘이 향기가 좋은 라일락(하지만 리건은 더 이상 향취를 맡을 수 없죠)을 담을 꽃병을 찾으러 간 사이, 

붕대를 뜯고서, 코 성형수술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슈퍼맨의 모습을 띄기도 합니다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건...

그는, 어느새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는 버드맨을 마주하곤 "잘 있어, 그리고 엿 먹어" 라고 내뱉죠.

그러다 병실 창문 쪽으로 다가가, 공중을 뒤적이며 날고 있는 새들을 무연스레 바라보던 리건은 돌연 창밖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립니다.

열린 결말일까요...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아래를 살피던 샘의 시선은 서서히 위쪽으로 향하죠.

그의 얼굴에 뜻 모를 웃음이 희미하게 번지며... <버드맨> 은 그 막을 내립니다.

 1. < 버드맨  > 트레일러 -
https://youtu.be/l7t6VurP-8g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신경증적인 인물들, 자조와 자학의 순간들을 비집고 어렵사리 피어나는 희망의 여명은, 

시카고 선 타임즈의 평처럼 
< 버드맨 > 을 “기묘하고 아름다우며 독특한 영화” 로 만들었죠.

무엇보다도 < 버드맨 > 은 팬티만 입은 채 공중부양 자세로 명상에 잠긴 남자와 건물 옥상을 점령한 거대한 익룡...

아울러 도시 한가운데로 내리꽂히는 화염과 
새 가면을 쓴 슈퍼히어로가 하늘을 나는 장면들이 어떻게 다르게 활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재기 넘치는 대답이기도 합니다.

< 21그램 > , < 비우티풀 > 등을 연출했던 이냐리투는 또하나의 역작 < 버드맨 > 을 통해 다양한 콤플렉스와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실적인 캐릭터를 직조해냈죠. 

배우의 실제 성격을 캐릭터에 입혀 브로드웨이 연극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듯 한 생생함도 정치하게 전했습니다. 

연기파 배우와 무비스타의 경계가 흐릿해진 21세기 할리우드의 생리와 대중문화의 양면성을,  이냐리투는 < 버드맨 > 의 다층적인 서사와 웃음을 위한 질료로 활용하고 있죠. 

유명 배우인 우디 해럴슨과 마이클 파스벤더, 제레미 레너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또 라이언 고슬링, 그리고 거장 마틴 스콜세지의 실명을 언급하며 쓴웃음을 유발하는 장면도 그 같은 맥락으로 기능합니다.

< 버드맨 > 은 그렇게, 코미디와 비애, 환상과 현실 사이를 고공 줄타기 하듯 오가며,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의 이면을 신랄한 블랙 유머로 담아냈죠.

관객들은 “사람들은 피와 액션을 좋아하지. 말 많고 우울한 철학 따위엔 관심이 없어” 라는 대사로 상징되는 대중문화의 천박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한 작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의 긴장감을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립니다.
 
안 좋은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화불단행(禍不單行) 격의 일련 과정은 마치 하나의 새로운 예술적 시험처럼 마지막 장면까지 일관된 호흡으로 전개되죠.

이냐리투는 <버드맨> 을 통해 주류 대중 문화산업의 전반을 조롱하면서도 그 존재의 필요성까지를 아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관심' 과 '인기' 를 먹고 사는 대중문화의 뿌리와 속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죠.

"말 많고 우울한 철학 따윈 관심 없다" 라며 관객을 직접 겨냥하기까지 합니다.

장중 내내 어디로 튈지 모를 불안정함을 품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모든 게 정치하게 무대 프레임 안에 설계된 <버드맨>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평범하지 않은...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때로는 오히려 그것의 현실성을 강화해주기도 합니다.

이냐리투 감독은 리건을 중심으로 혈관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를 속도감 있게 담아냈죠.

애인과 전처, 동료배우와 딸, 제작자와 비평가는 차례대로 리건과 부딪히며 그를 폭발 직전의 상태로 몰아갑니다.

- https://tv.kakao.com/v/66274301

리건은 딸 샘에게 탄식조로 털어놓죠. “이 연극이… 뭐랄까, 나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마치 내가 살아온 기형적인 삶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갖게 해. 아주 작은 망치로 끊임없이 불알 두 쪽을 얻어맞는 그런 느낌.”

- https://tv.kakao.com/v/66296581

이렇듯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버드맨> 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극중극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에도 적용됩니다. 

이 연극을 준비하며 리건은 점차 극중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죠. 

“나는 왜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하지? 난 당신이 원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어. 매일 다른 남자가 되려 애를 쓰며 산다고!" 

연극 속 주인공 에디로 분한 리건의 이 대사는 아내 테리 역의 레슬리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지켜보고 있는 무대 너머의 수많은 대중에게 던지는 리건 자신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리건은 실비아에게 자조 섞인 푸념을 건네죠. "마이클 잭슨과 파라 포셋이 같은 날 세상을 떠났지만, 세상은 더 유명한 마이클 잭슨만을 기억하지." 

실비아는 응답하죠. “당신은 항상 그래. 사랑과 존경을 혼동하지.” 

리건에게 있어 ‘사랑’ 은 대중의 동경을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데다, 그에게 가장 두려운 순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솔직해져요! 이 연극을 하는 걸 아빤 무서워하잖아요.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할까 봐서요. 그거 알아요? SNS 계정 하나 없는... 아빠는 이미 잊혀진 존재예요. 이 연극도 아빠도 중요하지 않죠. 그걸 받아들여요.” 

딸과의 말다툼 뒤 덩그러니 남겨진 리건의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  그 유령 같은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 가련한 남자의 초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건 연극을 준비하며 리건이 자기 자신의 밑바닥을 보게 될수록 상상 속의 그는 점점 비상한다는 점이죠. 

브로드웨이 한복판을 멋지게 나는 리건의 모습을 롱테이크로 담아낸 시퀀스는 < 버드맨 >의 가장 미려한 장면 중 하나로 울려옵니다. 

어쩌면 하늘을 가로지르며 맹렬하게 하강하는 이카로스의 이미지가 이 영화의 오프닝 신을 장식했던 순간부터 리건의 추락은 예정되어 있던 것일지도 모르죠. 

그러나 < 버드맨 > 속 추락의 순간을 통해 이냐리투가 보여주려 했던 건 파멸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감독의 의도대로 리건은 끊임없이 자신이 끝내 되지 못할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걸 입증하려고 몸부림치죠.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는 게임의 룰을 깰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감독은 극중 리건이 느끼는 불안과 강박을 드러내기 위해 그의 내면을 파고드는 대신, 리건을 옥죄어오는 주변세계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편을 택했죠.

< 그래비티 > 의 롱테이크로 유명한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가 < 버드맨 > 을 긴 호흡으로 상황을 관찰하는 기법이 아닌, 

밭은 숨을 몰아쉬며 극적인 몰입을 강화하는 장치인 '원 신 원 테이크' 영화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데 공을 들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입니다.

출입문을 열고 닫는 등의 행위 또한 일종의 장면 전환 장치처럼 활용되며, 덕분에 관객은 숨통을 조여 오는 무대의 압박감을 실감하게 되죠.

2. < 버드맨 > 속 클래식 음악

영화 < 버드맨 > 은 라벨에서 말러,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 또 존 애담스에 이르는... 클래식 음악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시종 우울함으로 화면을 지배하는 리건의 감성은 물론, 매 시퀀스별로 극적인 분위기를 맛깔나게 살려내고 있습니다.

2-1.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 https://youtu.be/BZSPkidM99E

리건과 그의 여자 친구 로라(앤드리아 라이즈버러 분)의 키스 씬이 끝나는 장면부터, 마이크가 진짜 술을 마시면서 연기 중인 사실을 무대 옆 스텝에게서 리건이 듣는 장면까지 흐르죠.

느린 2박자의 파반느 선율은, 마치 벨라스케스의 회화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 을 그리듯 먼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화음이 인상적입니다. 

목관 오중주의 밑그림에 하프와 현악의 선율들이 유화처럼 덧입혀지면서 벨라스케스 보다 더 고상하고 강렬한 초상을 그리고 있죠.

2-2. 말러 교향곡 '9번 D장조 1악장 안단테 코모도' - 미카엘 할라츠 지휘 폴리시 라디오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https://youtu.be/iJ01BxCyJro

말러의 '죽음의 교향곡' 이랄까요... 영화 <버드맨> 은 '잊힘'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합니다. 

화려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자아와 잊히지 않을 새로운 자아 만들기 사이에서의 치열한 갈등을 보여주면서, 과연 보여주기 위한 자아가 진정한 자아인지에 대한 문제 제기 또한 잊지 않죠. 

영화는 '잊힘과 사랑받지 못함은 곧 죽음' 이라고 극중극 속, 또 영화 속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끊임없이 얘기하지만, 사실은 그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비춰집니다. 

그러곤 딸의 목소리를 빌려 '타인의 관심과 사랑에 얽매이지 말라' 에둘러 충고하죠.

"아빠의 연극... 관객은 신경 쓰지 않아요. 단지 공연이 끝나고 어디서 커피를 마실지가 그들의 관심사일 뿐이죠."

첫 번째 프리뷰 공연 날, 리건은 사랑에 관해 논합니다. 이 장면에 치환된 음악이 바로 말러의 '교향곡 9번 1악장' 이죠.

이 교향곡의 악보에는 "젊음이여 사라졌구나 사랑이여 가버렸구나" 라는 문구가 적혀있어 '죽음의 교향곡' 이라는 별명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리건은 노부부의 고결한 사랑을 설파하죠. 이때 술에 취한 마이크가 왜 자신의 술을 '가짜(물)' 로 바꿨느냐며 술잔을 집어 던지고 무대를 난장판으로 만듭니다.

그러고는 관객에게도 
"가짜 삶을 살지 말고 진짜 삶을 살아" 라며 주정을 부립니다. 

무대의 배우가 관객에게 하는 말 치곤... 뭔가 거꾸로 돼도 한참 거꾸로 된 패러덕스인 셈이죠.

2-3.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e단조, Op.64
- 므라빈스키 지휘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https://youtu.be/DfibXOGFQSo

호른으로 열어지는 2악장 선율은, 리건이 딸 샘과 말다툼한 뒤에 혼자 남아 담뱃갑을 돌리는 장면부터, 로라가 사슴들이 있는 안개 속에서 연기하는 장면까지를 아우릅니다.

이 안단테 칸타빌레의 주제 선율과 함께
로라는 자신의 대사를 차분하게 풀어냅니다만... 이는 마치 리건과의 굴곡진 관계를 투영하는 것처럼 들리죠.

"닉이 우울증으로 폐인이 되어가고 있을 때 그는 내가 임신한 걸 몰랐어요. 알리고 싶지도 않았고요. 우린 살면서 선택들을 하고 그에 맞춰  살아가죠. 아니거나... 

난 아기를 원치 않았어요. 닉이나 아기를 사랑 안 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사랑할 준비가 안 됐었죠. 애석한 지난날은 부드러운 산들바람과  새들의 지저귐에 다 묻혀버렸어요..."

2-4. 말러의 '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Ich bin der welt abhanden gekommen) 
- 콘트랄토 캐슬린 페리어
https://youtu.be/p77JoONFX8U
 
뤼케르트의 시에 말러가 곡을 붙인 5개의 가곡 중 3번째 노래입니다.

그윽한 센티멘트를 품은 잉글리시 혼의 선율에 이어, 하프의 아르페지오가 곡을 이끌어 가는데...

마이크로 인해 속상해 울고 있는 레슬리를 리건이 위로하자, 그녀가 감사하는 장면에 삽입되죠.

2-5.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f단조, Op.36
2악장 Andantino in modo di canzona'
- M.T. 토마스 지휘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https://youtu.be/83F2cK4gG0M

오보에가 비감미로 가득한 선율을 노래하다가 현악기들이 화답하는, 장중한 곡조의 선율은
프리뷰 마지막 날 리건이 피날레 씬을 위해 가발을 쓰고 옷을 갈아입으며 로라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흐릅니다.

표제적인 요소가 강한 이 곡에서, 잊혀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는 리건의 초상처럼 그려지고 있는....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과 인간을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치는 운명의 그림자는 듣는 이에게 처참한 아우라를 던져주고 있죠.

2-6. 라벨 '피아노 3중주 a단조, M.67 중 3악장  'Passacaille (Très large)' - 보자르 트리오
https://youtu.be/1w-5F9MfTKE

우울하고 어두운 정열을 숨기고 있는 이 3악장 파사칼리아는 5음계로 진행하는 느린 형식의 곡입니다.

타비사와 논쟁 후 절망한 리건이 침통한 표정으로 위스키를 사는 시퀀스와 함께 하죠.

2-7. 존 애덤스 오페라 < 클링호퍼의 죽음 > 중
'Prologue: Chorus of Exiled Palestinians'
후반부 - 켄트 나가노 지휘 오페라 드 뤼온 
https://youtu.be/GSSYhtv_k3Q

리건이 노숙한 날 아침, 버드맨의 부추김을 들으며 터벅터벅 거리를 걷는 장면에서 감성의 미니멀리즘 선율로 펼쳐집니다.

2-8. 존 애덤스 '하모늄(Harmonium)'    
: 'Wild Nights'

곧바로 이어지는 블록버스터 시가지 전투 씬에서 
배경 음악으로 등장하지요.

2-9.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e단조 Op.27
2악장 알레그로 몰토 초반 '칸타빌레' 부분
- 네빌 마리너 지휘 슈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니
https://youtu.be/4vakSUcYEb8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번' 의 참혹한 실패로 인한 깊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오랜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보냅니다. 

그러던 그는 정신과 치료를 통해 극복의 시간을 보내고 '피아노 협주곡 2번' 을 통해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하지만, 아직도 교향곡은 자신에게 두려운 영역이었을 것이죠.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보란 듯이 명작을 탄생시킵니다. 그러곤 차이콥스키의 후예라는 칭호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교향곡 작곡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죠. 

따라서 이 곡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 다시 비상하는 리건에게 보내는 응원가인 셈입니다.

다른 악장도 아닌 활기로 가득 찬... 번잡하고 광활한 스케르초 중 잠간 흘러나오는 그 2악장의 칸타빌레는 마치 한순간 표출되는 '진심' 으로 울려오죠.

그 예기치 못한 ‘희망의 전조’ 를 목도케 하는 이 멜로디는 엔딩 씬에 리건이 병원 창문을 열고 홀연히 사라지는 시퀀스와도 함께 합니다. 

이어 샘의 미묘한 웃음소리를 아우르며... 엔딩 크레딧은 안토니오 산체스의 드럼 스코어와 절묘하게 연결되지요.

3. 안토니오 산체스 OST
- 'The Anxious Battle for Sanity'
https://youtu.be/E2acgyL_KCA

'드럼 작곡가' 라는 말이 생소하겠지만 스크린을 강렬하게 관통하는 산체스의 전위적인 드럼 음악과 연주는, 영화에 몰입도와 긴장감은 물론 생동감과 재미를 주는 데 큰 역할을 해줍니다.

이처럼 산체스의 실험적인 OST는 기존 영화 음악의 틀을 깨부수며,   또 하나의 주인공 역할을 하죠. 

영화의 여러 장면을 드럼으로만 묘사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을 텐데... 산체스는 놀랍게도 
주요 멜로디 라인을 걷어낸 채, 뭔가 21세기 비밥 재즈적인 연주 기법을 통해 파격적인 표현을 담아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하여 산체스의 오리지널 드럼 스코어는 헨드헬드 촬영과  어우러져 인물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표현하는 중요한 장치로 자리매김하죠.

공연 개막 전 드러머가 몸 풀려고 두드리는 듯 약간 어수선한 드럼 비트들은 상황에 따라 암유적으로 변주되며 공연 리허설 장에 앉아 있는 듯 한 느낌을 갖게 해줍니다.

이울러, 산체스는 환각을 겪는 리건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 들어설 때 그 공연장 내부에서 의연하게(?) 직접 드럼을 연주하는 등 환상적 리얼리즘을 확장하는 역할도 충실히 소화해냈죠.

영화 속 클래식 음악을 주제로 '클래식은 영화를 타고' 칼럼을 쓰며 강의도 하고 있고, 조만간 책으로 출판 예정이라고... 현재 영등포문화재단 혁신경영관으로 재직 중이다.

- 李 忠 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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