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디 앨런이 선사하는 삶의 아이러니와 사랑의 환상에 대한 한바탕 헛소동의 수다
<환상의 그대>가 있습니다.
앨런은 자신이 좋아하는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며 드라마를 시작하지요.
“인생은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고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다!”
50년 가깝게 매년 쉼없이 정력적으로 영화를 만들어왔고 등장인물들을 수다의 홍수에 빠뜨린 우디 앨런...
그가 도달한 결론치곤 사뭇 허무하다 느낄 수 있겠지만 이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작품 세계의 바탕이었죠.
<환상의 그대>는 40년간 결혼생활을 해온 헬레나와 알피, 그리고 그들의 딸인 샐리와 사위 로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영화는 이 두 커플이 이혼하고 각자 다른 짝을 만나는 부부 해체 과정과 새로운 사람에게로 끌리는 국면을 솜씨있게 담아내죠.
일에 빠져 앞만 보고 달려온 알피(앤소니 홉킨스 분)는 어느 날 밤 갑자기 '영원한 죽음' 이 다가옴을 느끼며 대오각성하게 되는데... 그 뒤 그의 인생 모토는 '웰빙', 곧 조깅과 건강식품이 돼버립니다.
알피는 스포츠카를 사고, 치아 미백과 태닝을 하며 새 삶인 '제2의 청춘' 을 꿈꾸죠.
그는 젊게 살고 싶은 일념으로, 언제나 '솔직하고 바른 말' 만 해줬던 조강지처 헬레나(젬마 존스 분)를 버리고, 딸벌의 어린 여자와 결혼한다고 전격 발표합니다.
불쌍한 헬레나, 그녀는 '진실은 늘 아름답다' 라는 말을 철썩같이 믿었던 게죠. 사실은 반대인데...
남편에게 배신당한 채, 큰 충격과 절망으로 알코올 중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자살까지 시도했던 헬레나는, 미래를 본다는 깜찍한 사기꾼 점성술사 크리스탈(폴린 콜린스 분)을 만나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됩니다.
크리스탈은 첫 상담일부터 감언이설로 헬레나의 혼을 쏙 빼곤, 그녀를 장미빛 환상에 빠뜨리죠.
"헬레나, 당신의 문제는 늘 스스로를 탓한다는데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너무 괴롭히고 있어요.
제 앞엔 지금 엄청난 게 보입니다. 긍정적 에너지의 거대한 물결이 당신에게 몰려가고 있어요. 당신에겐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거에요. 내 말 믿어요. 더욱이 당신 전남편은 새로 만난 여자를 당신만큼 사랑하지는 않을 거에요."
한데... 그들의 딸 샐리(나오미 와츠 분)는 소설가 데뷔 후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 못하고 있는 반백수 남편 로이(조쉬 브롤린 분)와 다툼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차기작 압박에 시달리던 로이는 건너편 집 창가의 붉은 옷을 입은 신비스런 여인 디아(프리다 핀토 분)에게 집착하게 되죠.
생활고와 스트레스에 괴로워하다 결국 꿈을 접고 갤러리에 취직한 샐리 역시, 부유하고 지적인 매력남 직장 상사 그렉(안토니오 반데라스 분)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품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삶의 전환점과 관계의 위기, 그리고 사랑의 유혹 앞에 선 여덟 명의 남녀... 그들을 둘러싼 동상이몽의 좌충우돌 로맨스가 코믹하게
풀어지죠.
헬레나는 남들이 뭐라든 환생을 믿으니 삶에 희망이 생깁니다.
예지력이 넘치는 크리스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 헬레나는 "그저 듣고 싶은 이야기 해주고 돈 받는 거에요" 라며 비아냥대는 밉쌀스런 사위 로이를 향해 한방 먹이죠.
"자네는 나에게 돈(생활비) 받으면서도 듣고 싶은 이야기 안 해주잖아?"
시니컬한 로이는 그런 장모 헬레나를 보며 “신경안정제보다 환상이 도움이 된다” 는 평가를
나름 내립니다.
생뚱맞게도 모차르트의 세레나데 6번 D장조가
우아하게 흐르는 가운데... 샐리는 로이와 함께 트로피 와이프(Trophy Wife) 격인, 아빠의
새 아내 샤메인(루시 펀치 분)과의 상견례를 갖습니다.
공상과학영화 속 외계 행성 지도자의 딸 역할로 할리우드에 잠깐 진출했었지만 워낙 배타적인 동네인지라 연줄이 없어 잘 안됐다는 샤메인...
샐리가 샤메인에게 그럼 앞으로의 계획이 뭐냐고 묻자, 그녀의 삶을 변화시킬 거라던 알피는 대신 대답하죠.
"계획은 나랑 결혼하는 거야. 셰프리지 부인이 되는 거지. 아들을 낳아 축구를 가르칠 거야."
집에 돌아온 샐리는 로이에게 흥분하며 외칩니다.
"엄마랑 이혼하고 만난 여자라는 게 그런 싸구려라니! 잠자리 연기가 다였을 삼류 여배우하고 말야. 남보기 창피하고 역겨워 혼났네. 아빠가 나보다 먼저 애를 가지면 그게 무슨 망신이야?"
알피는 그래도 전처 헬레나가 너무 무기력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랜 친구인 피터 부부에게 그녀를 퍼스널 쇼퍼로 고용하도록 부탁합니다.
그런데 헬레나는 그곳에서 피터의 자상한 신비주의자 삼촌 조나단을 소개받게 되죠.
요즘 한창 영혼과 접촉(?) 중이라는 그는 최근에 부인과 사별했는데 '오컬트(Occult) 서점' 을 운영하며 그 쪽에 아주 독실하다고 조카는 전합니다.
한편, 로이와 샐리는 싸우는게 일상이 돼버려 그들이 어떻게 처음부터 사랑했는지 잊어버렸죠.
서로에게 빠졌던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시절... 로이는 샐리에게 말했습니다.
"의대를 졸업하던 날 의사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지. 오로지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뿐였어."
로이의 처녀작은 그런대로 주목받았지만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한편, 샐리의 상사 그렉은 선물용 명품 목걸이를 사야 한다며 그녀에게 조언해달라고 하더니만, 오페라 공연에 함께 가면 어떻겠냐고 은밀히 다가섭니다.
그것도 품격있는 도니제티의 벨칸토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말이죠.
오페라를 같이 감상하며 샐리는 이토록 고상하고 배려심 깊은 훈남 그렉에게 홀딱 반하고 맙니다.
파국을 예감했을까요... 매력이 철철 넘친다며, 그렉에게 완전히 빠진 샐리를 향해 친구는 진지하게 충고하죠.
"상사와 너무 가까이 지내면 안돼. 파멸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그래도 친구는 지금이 적기라며 샐리에게 갤러리 비지니스를 동업하자고 제안해 그녀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합니다.
어느날, 로이는 친구 헨리로부터 자신의 첫 소설을 읽어봐 달라는 부탁을 받죠.
한데 헨리의 처녀작은 로이의 네번째 소설보다 훨씬 훌륭했고... 작품을 다 읽고 난 로이는 다시 침울해집니다.
그가 삶의 위안을 받는 유일한 대상은 건너편 창가에서 갈수록 자신을 애타게 만드는 디아뿐이죠.
그녀는 보케리니의 기타 5중주곡 '판당고'
한 소절을 연주하다가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미안해합니다.
누군가의 뮤즈가 되는 게 꿈이었다는 디아에게 로이는 "제 다음 책은 붉은 옷의 여인에게 바치겠습니다" 라며 노골적으로 집적거리죠.
책 출판에 대한 아무 소식이 없자 불안감만 커져 가던 로이는 출판사로부터 '부분은 좋은데 전체론 그렇다' 는... 사실상 거절 통보를 받곤 매우 고통스러워 하죠.
한데 뜻밖에도 동료로부터 헨리가 사고로 죽었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앞뒤 가릴 계제(階梯)가 아닌 로이는 이성을 잃은 채, 헨리의 원고를 훔쳐 출판사에 버젓이 자신의 야심작이라며 건네죠.
결국 기대 이상으로 폭발적인 호평을 받으며 스타 작가 반열에 오른 로이... 그는 급기야 샐리와 이혼한 후, 유명 소설가와의 로맨틱한 삶을 꿈꾸는 디아의 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듯 남편에게 헌신짝처럼 버림받은 헬레나와 샐리 모녀는 각자 짝을 찾아나서지만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죠.
샐리는 그렉에게 신인작가로 적극 추천해줬던 친구 아이리스가, 자신이 그렉을 위해 모델 노릇까지 하며 골라준 목걸이를 하고 있는 걸 발견합니다.
안타깝게도... 아이리스는 그렉과 사랑에 빠졌다며 샐리를 절망케 하지요.
미련을 못버린 채 다가서는 샐리를 향해, 그렉은 야속한 결별의 말을 전하며 그녀를 또다시 비참하게 만듭니다.
"우린 예술적 취향이 비슷한 동료 관계였소. 난 이혼한 후 당신이 소개해준 아이리스와 새 삶을 꾸릴거요. 아뭏든 이젠 갤러리 업계의 라이벌이 됐네요. 정말 인생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아름답지 않소? 새 사업에 행운이 있기를 빌겠소."
훤칠하고 잘 생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사람이라며... 헬레나가 새롭게 결합하려 애쓰는 조나단 역시, 사별한 전처를 잊지 못한 채 사뭇 그녀의 애를 태웁니다. 죽은 여자와 경쟁하는 게 제일 힘든 셈이죠.
하지만 네명의 중심 인물 중에서 가장 안쓰러운 처지로 전락하는 건 알피입니다.
엉덩이에 인공관절을 넣은 자기 나이 또래의 여성은 질색였던 알피는, 그토록 원하던 쭉쭉빵빵 몸매를 지닌 콜걸에게 매혹되어 재혼했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남는 건 환멸뿐이었죠.
그런 알피는 고민 끝에 헬레나를 만나 크게 실수했다며 다시 시작해보자고 간청하지만, "새 삶이 있어 과거를 잊고 싶을 뿐" 이라는 그녀에게 보기좋게 퇴짜를 맞고 맙니다.
헬레나는 나름 진지하게 거절의 변을 얘기하죠.
"알피, 다음 생이 있으니 걱정말아요. 우리 인생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아요. 이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비밀이 있다고 해요. 난 전생이 있어요. 크리스탈이 알려줬고, 내 영적 세계를 이해해주는 신사분 조나단도 알아요.
이제 당신에겐 새 아내가 있잖아요. 아들 갖는 게 소원이었으니 그 여자한테 낳아달라 해요..."
소설가 사위 로이의 결말 또한 결코 이에 못지않게 찌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뜻밖에도, 죽은 줄만 알았던 헨리가 비록 의식불명의 큰 부상을 입은 상태이지만 아직 살아 있다는 청천벽력의 비보를 접하죠.
실제 병문안 자리에서 헨리는 로이가 벨파스트의 아동 포르노 작가 얘기를 써 베스트 셀러는 따논 당상이라는 얘기를 들려주자... 눈을 깜빡거리는 기적(?)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샐리 역시, 철석같이 믿었던 엄마 헬레나로부터 자신의 새로운 갤러리 사업을 위한 경비 지원을 거부당하죠.
크리스탈이 별점을 보아하니, 당분간 딸 샐리는 전망이 없어 보이니까 돈 빌려주면 안좋다고 했다나요...
영화 엔딩 신... 내레이터는 오프닝 크레딧에서도
흘렀던 레온 레드본의 노래 'When you wish upon a star' 를 배경으로 담담하게 전합니다.
"이제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무의미한
이야기를 마쳐야겠다. 인생은 이렇듯 불확실성과
고통으로 가득 차있는데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로이가 말했듯이 가끔은 환상이 신경안정제보다 도움이 된다."
새 연인 조나단은 헬레나에게 하늘나라의 전처가 당신과의 재혼을 드디어 허락했다며 고백하죠.
"난 전생이 가끔 떠올라요. 농부였던, 그냥 평범한 농부... 그렇지만 당신은 아주 특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