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식의 '클래식은 영화를 타고' 210007] 더 퀸 - The Queen
[이충식의 '클래식은 영화를 타고' 210007] 더 퀸 - The Queen
  • 이상호 기자 sanghodi@hanmail.net
  • 승인 2021.04.18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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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왕의 아름다운 승복 -

'왕관을 쓴 자, 그 누구도 편히 쉴 날 없나니' 
(Uneasy lies the head that wears a crown)

<더 퀸>은 셰익스피어 희곡 <헨리 4세>의 2부 3막 1장 대사로 그 막을 열어가죠.

1997년 5월 2일,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의 
10번째 총리인 토니 블레어를 만나 왕실 인증 절차를 마칩니다. 

여왕은 군주제 반대론자를 아내로 둔, 급진적 개혁 성향의 총리를 마뜩지 않아 하죠.

한데, 그로부터 4개월 가까이 지난 8월 30일...
1500년 역사의 영국 왕조가 배출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 다이애나 비가 프랑스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집니다.

그러나 왕실 가족들은 이혼했으니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왕족이 아니라며 거리를 둔 모습을 보이죠.

소식을 전해 듣고 사태가 간단치 않음을 직감한 블레어 총리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추도식 절차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여왕은 총리와 통화하면서 민간인의 일이므로 자신은 추모 성명을 발표하지 않을 것이며, 다이애나 유족의 뜻을 따라 가족 장례로 치룰 것이라고 잘라 말하죠. 

국민들의 감정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블레어는 크게 곤혹스러워합니다. 

"자신들이 그녀의 인생을 망쳤으면 고이 보내드리기라도 해야 할 텐데..."

영국 왕실은 오히려, 어머니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어린 왕자들을 배려해 여왕 가족들을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으로 잠시 떠나 있도록 조처하죠
 
그 사이 버킹검 궁전 광장엔 다이애나 비의 죽음을 슬퍼하는 국민들의 추모가 끊이지 않고, 뜨거운 애도행렬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됩니다.
 
평소 다이애나 비와 사이가 좋지 않기로 소문난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가 며느리의 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국민들의 눈에는 이런 여왕이 마치 냉혈한처럼 비춰지죠.

다음날 총리는 애정이 담긴 추모 성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파리로 가서 다이애나의 시신을 영국으로 운구한 찰스 왕세자(앨릭스 제닝스 분)는, 유해를 맞이하러 공항에 나온 총리와 함께 가족장으로 장례를 진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데에 공감하죠.

이틀 후 다이애나의 장례를 위한 비상대책회의가 열립니다만... 여왕은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국장으로 치루기로 했다는 회의 결과를 보고받게 되죠. 

반면에... 블레어는 찰스로부터 총리와 뜻을 같이 하겠다는 호의적인 전화를 받습니다. 

국민들은 다이애나 비의 죽음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지 않고, 계속 휴양지에 머무르고 있는 왕족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죠.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이 심각하게 나빠지는
가운데... 민심을 제대로 읽는 총리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다며 보좌관들은 반색하지만, 정작 블레어는 이런 상황을 마냥 반기지 않습니다. 

"여왕에게 문제가 생기면 우리도 힘들어져요"

그런 총리는 여왕에게 전화해서, 왕궁에 조기를 게양하고 런던으로 돌아와주실 것을 거듭 정중히  요청하지만, 여왕은 이를 거절합니다. 

"무슨 박람회 구경거리도 아니고... 다이애나는 이미 주목을 받을만큼 받았네!"

그럼에도 블레어는 국민들의 태도에 낙담하는 여왕을 나름 이해하며, 왕실에 대한 적대감을 부채질하는 언론 보도를 자제시키려 노력하죠.

여왕은 TV를 통해 며느리의 생전 인터뷰를 보며 착잡해 합니다.

" 전 국민들 가슴에 남는 왕비가 되고 싶을 뿐 왕비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제가 왕비가 되는 걸 원치 않는 분도 많고요. 

현재 왕실의 높은 분들은 제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위험해 보였나 봐요. 진실하게 살고 싶어서 위선을 거부했더니 결국 고통이 오는 군요."

" 남편의 옛 애인 카밀라 땜에 이혼한 건가요?"

"한 남자와 두 여자가 같이 사는 기분이랄까요?"

여왕은 남편 필립 공(제임스 크롬웰 분)에게 털어놓습니다.

" 솔직히 우리도 책임이 있는 거 인정합시다.
우리도 결혼을 부추겼잖아요. 당신이 유난히 좋아했던 거 기억해요?"

필립은 며느리가 죽어서도 가족들의 속을 긁는다며 심드렁하게 답하죠.

" 그 땐 애가 말쩡했잖소. 찰스도 애인을 포기했고, 다이애나도 얌전히 살 줄 알았지. 여자 문제가 뭐 대수라고!"

다음날 어느덧 칠순을 훌쩍 넘긴 여왕은 사냥터의 손주들을 보러 직접 운전해 가다가 차 쉬프트 고장으로 어쩔 수 없이 멈춰서게 되죠.

망연(茫然)히 밀려두는 야속함, 서글픔에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홀연히 나타난, 뿔이 14개로 갈라진 웅혼(雄渾)한 기상의 사슴을 마주하게 됩니다.

고개 숙여 흐느끼는... 홀로 있을 때만 눈물을 훔칠 수 있는 여왕의 뒷모습에서 그녀가 헤쳐온 세월의 흔적이 오롯이 묻어나지요.

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여왕은 사슴을 향해 사냥꾼들로부터 어서 달아나라며 탄식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하지만 여왕은 도망갈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군주이기 때문에...

악화일로인 국민들의 여론 추이를 보며 고민을 거듭한 총리는 여왕에게 전화를 걸어, 

군주제 폐지에 대한 국민들의 뜻을 언급하며 자신의 생각을 따라주길 간곡히 부탁하죠.

치열한 번민 끝에 결단을 내린 여왕은 어머니 엘리자베스 1세께 정부의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요구를 말씀드립니다.

" '하나, 왕궁과 모든 왕실 저택에 조기를 게양한다. 둘, 조속히 런던으로 떠난다. 셋, 직접 다이애나 관에 조의를 표한다. 넷, TV 생중계로 추도문을 발표한다.'

그대로 안했다가는 제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군요. 제 편은 한명도 없어요.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너무 변했어요. 국민에게 버림 받았으니 물러나야죠."

왕실을 위태롭게 할 거라며 걱정하는 여왕을 어머니(헬렌 매크로리 분)는 질책하면서도 또 격려합니다.

"무슨 소리! 네가 한 선서 기억나니? '오직 국민을 위해 일할 것입니다'. 국민과 신 앞에서 한 약속이다.

위태롭다니? 넌 가장 훌륭한 왕 중 하나야. 네가 그만두면 진짜 문제될 거다. 그런 생각하면 안 돼! 흔들리지 말고 권위를 지켜야 한다. 

넌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이고 천 년 넘게 이어온 정통 왕가의 후손이야. 울고 짜는 국민들 눈물 닦아주러 당장 달려가라고? 선조 군주 중 누가 그런 짓을 했겠니? 능글능글 별걸 다 트집잡는 총리라니..."

그러나 런던으로 떠나기 직전, 결국 한 은행가의 총에 맞아 박제가 된 제왕급 사슴의 시신을 보고 여왕은 만감이 교차하죠.

"고통스럽게 죽지 않았길... 사냥꾼에게 축하한다고 전해주게."

마침내 런던으로 돌아온 엘리자베스 여왕은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국민들 앞에 섭니다.

블레어 총리는 "저 할머니, 등 떼밀려 온 표정하곤..." 이라며 빈정대는 보좌관을 크게 힐책하죠.

"자넨 그렇게도 생각이 없나? 저 분은 어쩔 수 없이 일생을 바쳐 일하셨네.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진 곳에서 50년 간이나! 

근데 명예롭게 살아온 그 분한테 우린 어쨌나? 국민들 비위 맞추라고 협박이나 하고! 이 나라의 군주가 왕실에 먹칠을 한 사람을 위해 조문을 하고 있네. 여러 해 동안 자신의 소중한 걸
짓밟힌 여왕인데..." 

총리는 늦게나마 엘리자베스 여왕의 깊은 고뇌를 헤아리며 그녀의 속내를 대변한 게지요.

'여왕 탄생일' 이나 '승전 축하식'이 아닌, 비극적인 사건으로 여왕이 궁전 밖으로 나와 대중 앞에 선 경우는 종전 축하 후 처음으로, 

언론은 이를 마치 국민과 군주 왕족이 싸운 후 화해한 상황으로 풀어냅니다. 

'다이애나 사랑합니다', '천사같은 분',
'저들은 당신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저들의 손에는 당신을 죽인 피가...'

여왕은 왕실을 미워하고 다이애나를 사랑하는 국민들의 추모 글귀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죠. 

한데... 추모 인파 속에 있던 한 여자 아이가 폐하께 드리고 싶다며 꽃다발을 건네고, 추모객들도 예의를 다하자 여왕은 그제서야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습니다. 

생중계를 앞두고, 여왕은 추도문의 내용에 대한 총리실의 마지막 요청까지 모두 받아들이죠.

여왕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성심 성의껏 추도사를 읽어 내려갑니다.

"난데없이 슬픈 소식이 들려온 후 전국민의 눈물을 보면서 제 자신도 얼마나 애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픔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고통도 겪었습니다.

충격이 너무 심하면 남겨진 사람에게 의혹과 분노, 또 우려를 전가하게 되죠. 물론 다 너무 슬퍼서 생긴 일입니다. 

여왕으로서, 그리고 할머니로서 진심으로 말씀 드립니다. 아이들에게는 헌신적인 어머니였던...
우리 모두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다이애나의 삶이 얼마나 진실했는지는, 애도의 물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다이애나를 소중히 간직하는 여러분, 비록 다이애나는 떠났지만 여러분이 어디에 있건 고인의 짧은 생애를 같이 애도하기 바랍니다.

평화롭게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진심이라고? 진심 같은 건 없으면서..." 라며
비난하는 부인 체리(실비아 사임스 분)를 블레어
총리는 다독거리죠.

"저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소! 처절해 보이잖소..."

하지만 왕실에 대해 비판적인 체리는 계속해서 여왕의 추도사를 폄하합니다.

"당신 왜 그래요? 1주일 전만 해도 '민중의 왕세자비'(People's Princess)라고 외치던 사람이! 갑자기 비굴해졌네요. 뭐 놀랄 것도 없죠. 결국 개혁파 노동당 총리들이 모두 여왕의 충복이 되니까요..."

9월 6일 토요일,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다이애나 비의 장례식이 엄숙하게 거행됩니다.

그 자리엔 여왕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 총리와 함께 수많은 명사, 그리고 국민들이 참석했죠.

화면은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엘톤 존,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 톰 행크스, 톰 크루즈, 니콜 키드먼 등 생전 다이애나 비와 가깝게 지냈던 유명 예술인과 영화인들의 모습을 비춥니다.

베르디의 '레퀴엠' 중 '리베라 메'(Libera Me : 저를 구원하소서)가 처연히 흐르는 가운데,

화면 속엔 생전의 다이애나가 활짝 웃는 모습과 슬픔에 오열하는 영국 국민들...

그리고 극중 침통한 표정의 여왕 가족들, 또한 숙연한 총리 부부의 영상이 절묘하게 콜라쥬되고 있죠. 

그리고 2개월 후... 체리 블레어는 여왕을 알현하러 가는 남편에게 묻습니다.

"여왕이 '군주자의 구세주' 역할을 해준 당신의 공을 인정해주실까? "

총리는 그때 주제넘은 짓을 했던 건 아닌지 충심으로 여왕에게 사과드립니다.

"그런 건 전혀 없었소... 다만 내 상식으론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