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안동 이육사 문학관 '현초 264전'을 다녀와서
[독자기고] 안동 이육사 문학관 '현초 264전'을 다녀와서
  • 이상호 기자 sanghodi@hanmail.net
  • 승인 2021.01.2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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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다큐멘타리 감독 한긍수
현초 이호영

찬 겨울, 안동 도산서원에 이르니
인적은 없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다.
저 건너 이육사 문학관에서 내뿜는 香이다.

264문학관에서는 64가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가 파릇한 생기를 내뿜으며 춤추고 있었다.

기억의 저편으로 스러져간 64의 詩, 
메마른 글자에 숨을 불어넣고
氣와 魂을 흐르게 한 것은
현초 이호영의 書, 藝다.

현초는 최근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 
카톨릭 크리스찬인 현초는 세 해 전에 성경 테마 서예전을 열었고
두 해 전에는 전북을 노래한 시 100여 편을 형상화했는데, 
이번 264詩 세예전은 그 맥을 잇는 작업이다. 

경전의 글귀, 시를 書하는 것은 아주 오래전, 어쩌면 서예의 시작부터 그러했을 터이니 새롭지 않다. 
현초의 독자성은 詩書畵의 혼연일체랄까, 삼위일체라 할 수 있다.

동양의 문인화는 시, 서, 화 가 한데 어울린다. 시로 글材를 삼고 글題와 어울리는 畵가 조화롭게 배치돼 작품을 이룬다. 그런데 현초의 작품은 詩가 書이고 書가 곧 畵가 되니 시, 글씨, 그림이 한 몸체로서 삼위를 이루는 것이다. 

본디 書란 글씨 한 字 한 字에 조형성이 있다. 그런데 현초는 글씨 하나하나뿐 아니라 글씨 전체가 조형을 이루어 글귀의 뜻, 의미를 구현해낸다. 현초 書의 조형성(畵)은 그가 동양화를 전공한 영향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쩜 현초는 처음 예술 끼가 발동한 고교 때부터 書畵의 구별心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글씨에 기가 흘러야 한다.

이번 264展에 나온 작품들은 대체로 소품이다. 작은 건 손바닥 크기, 좀더 큰건 호박잎 정도의 화선지에 글씨를 썼다. 그러니 제목은 中필, 본 글은 細필을 썼다. 작은 종이에 세필로 글씨를 쓰는 일은 쉬울까, 어려울까?

"쉽고 어렵고는 기술의 차원에 있지 않다.
세필로 글씨를 쓸 때 글씨를 눈으로 보면서 쓰지 않는다. 마음에 흐르는 대로 붓을 놀린다. 중요한것은 글씨에 氣가 흐르는가,이다.
氣가 흐르지 않으면 죽은 글씨다.
세필로도 氣가 흐르게 하고, 생동감을 일으켜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다"

현초는 누구 글씨를 本으로 삼았는가?

"젊을 때 구양순 왕희지 원교 추사 등
古典을 따라 수십 수백만 글자를 쓰고 획을 그었다.  해서 행서 초서 전서를 다 쓰고서 어느 시기부턴가 그 法을 다 버렸다. 내 글씨의 획, 점 하나마다에  法의 흔적이 살아있겠지만 내가 추구하는 건 典을 벗어난 자유로움이다."

작가의 개성은 문체에 드러난다.
글씨에 현초의 개성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고전의 서체를 벗어나 나만의 서체를 만들었다. 나의 미적 감각, 의지가 반복되면서 결과적으로 형성된 體이다. 이 작은 작품에서도 크게 네 가지 서체가 쓰이고 있다. 어떤 체는 획이 수평을 이루고 어떤 체는 사선을 지향한다. 네 가지 서체가 서로 섞이고 융합되기도 하니깐 엄밀히는 몇개의 서체로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글씨는 언제 쓰는가? 붓과 먹이 있고 글감이 생기면 글씨가 써지는가?

마음이 잡히지 않으면 붓을 잡고 아무리 용을 써도 글씨가 살아나지 않는다. 氣가 흐르지 않는다""정신이 맑게 깨어있고
마음엔 자유로운 에너지가 흐르고
몸이 강건해야 붓을 잡는다.

그런 몸과 마음은 어떻게 만드는가?

"거의 매일 집근처 산에 가서 맨발로 땅을 밟는다. 신발, 양말을 벗고 맨발로 땅위에서 30-60분 정도를 뛰면 발이 시리고 얼얼해진다. 그러고서  양말을 신고 산에 오르면 언 발이 녹으면서 몸 전체로 기가 흐른다.
몸은 그렇게 닦는다(修).

작품을 앞두면 작품에 몰입함으로써 삿된 생각을 없앤다.
예컨대 64시인의 詩를 쓸 때는 64의 생가, 유적을 찾아 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64선생의 정신으로 빙의해보는 것이다"

64의 詩를 현초가 썼다.
그 글씨에는 누구의 혼이 흐를까?

현초가 쓴 글씨에는 현초가 중심에 있고, 64는 둘레를 돈다 할 수 있겠다. 

현초는 글씨로써 64의 정신, 시어를 재해석했다. 그것은 이미 64의 원형이 아니고 그 원형의 재현도 아니다. 현초의 해석은 21세기, 예술가 현초의 독자적 해석이다. 새로운 창조, 창작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예술이다).

간간히 현초의 글씨가 활자에 비해 가독성이 떨어져 잘 안 읽힌다는 불평이 들린다. 그건 서예의 본질에 무지한 불평이다. 난 초서, 전서에 까막눈이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피카소, 달리의 '라스 메니나스'는 벨라스케스의 원형과는 완전히 다르다.
현초의 글씨에서는 書의 藝, 氣를 느끼는데 집중해야 한다.

漢字와 한글이 한데 섞이다.

현초 글씨의 미덕으로 꼽지 않을 수 없는 게 한글, 한자 서체를 통합한 것이다.

한자는 상형문자, 한글은 소리글자라 해서 조형의 원리가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한글, 한자는 따로 논다.
그런데 현초의 글씨에서는 그 구별이 사라진다. 한자, 한글이라는 개념자체가 사라지게끔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것이다.('고향 갈담'을 보라)

고정된 틀을 깨고 부수는 해체의 사고가 현초에겐 깃들어 있다.
시 '산벚꽃 나타날 때'의 제목 글씨를 보자.
'벚'자는 자모음의 결합이 거울에 비친 듯 좌우가 바뀌었다. 오직 '벚'자만..
'산'자는 한자인지 상형글자인지 한글인지 인수 없을 정도다.
산의 ㅏ를 ㅓ로 썼다. ㅏ도 ㅣ ㆍ의 두 요소로 해체해서 좌우결합을 변형한 것이다. 이러한 변형, 해체, 재결합으로 해서 현초의 독자적 미학, 조형미가 생기고 '산벚꽃'의 원초적 느낌이 드러나기도 하는.것이다.
이런 자유로움, 해체야말로 현초의 창조적 에너지의 근원이 아닌가 싶다.

좋은 작품을 꼽는 기준으로 격조와 개성을 꼽는데 현초의 작품은 이 둘을 온전히 갖췄을 뿐 아니라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여기에
바램이랄까, 기다림이랄까를
덧붙이자면

언젠가 현초가 진짜 자신감이 넘쳐 그 무엇도 의식하지 않는 無碍함으로

멋 부림에서마저도
벗어날 날이 오지 않을까 

혼자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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