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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2. 삼천리




[ ...... 「도망한 장교들은 잘했다」고 동료들이 부러워하면서 ........

...... 바람이 부러서 창이 덜걱거려도 께페우가 오지 않는가 ......... ]




[ ...... 농민은 .... 혁명이전 때가 살기 좋았다 해요. .........

...... 부담이 많어서 입는 것은 고사하고 빵문제 해결에도 곤란합니다. ........

...... 지금은 백퍼-센트가 다- 빈민 ....... 만족히다고 볼수 있는 것은 농촌에 있는 청년공산당원 뿐 ........ ]




[ ...... 독신이래도 8시간 勞働이면 겨우 살어갈 정도 ........

...... 물건이 니러졌으나 께페우는 재판에 부칠 수가 없으니깐 상점의 책임이 되여서 ........


...... 트로키스트 ..... 1937년 1월부터 38년 5월까지 그 명목 하에 검거당한 인수가 전부 2백60만 ........ ]



[ ...... 데파-트 한 집의 상품만 해도 하바롬스크全市에 있는 상품보다 아마 더 많고 ........ ]




삼천리 제10권 제12호

1938년 12월01일




蘇聯事情 듯는 座談會, 脫走하여 朝鮮에 온 赤露士官으로부터


出席者


脫走 赤軍士官 이반 야꼬레비치 나하로프

脫走 赤軍兵 표오톨 마까로비치 이봐노프

權忠一, 朴得鉉, 金漢卿, 朴英熙,

이박게 朝鮮軍 囑託 高井邦彦




지난번 高鼓峯事件 때 蘇聯 極東軍에서 탈출하여 蘇聯兵 2명이 새로운 살 길을 찾고저 OO에 와 있는 것을 기회로 그들을 中心삼어 이 좌담회를 열었다. 질문한 사람들은 元共産黨 幹部로서 入露의 경험조차 가젔든 몃 분들이다. 우리가 이 좌담회를 개최한 까닭은 蘇聯知識의 一資料를 어드려고 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 탈주병이 祖國蘇聯을 어떻게 보는가를 알고저 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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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井. 그러면 나부터 먼저 張鼓峰事件에 현지에서 탈주해 온 蘇聯兵<92> 2명을 소개하겠읍니다. 이분은 나하로푸군 24세올시다. 저쪽 분은 이와노푸군 22才올시다. 양군이 다 歐羅巴 로시아 출신으로 나하로푸군은 8년제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서는 하사관양성소를 중도에서 퇴소했읍니다. 이와노푸군은 극히 짧게 밖에 학교에 가지모했음으로 무학이라해도 과언이 아입니다.


나하로푸. 사건이 勃發하기 얼 전에 일인대요. 蘇聯의 장교 6명이 ****?近에 갓는데 수비병들이 확실히 삼림 속에 들어간 것을 보았다고 하지만 장교 6명이 죄다 행방불명이 되었든 것입니다. 내 생각엔 그이들도 滿領내에 탈주한 것 같슴니다. 그때 내가 있든 군대가 1개 연대 출동해서 장교 6명이 들어간 국경 부근의 산을 죄다 찾어 봤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말었읍니다. 그때 도라오면서 「도망한 장교들은 잘했다」고 동료들이 부러워하면서 외국의 이야기들을 했는데 그것이 내게 있어서 마음의 파동을 이르게 했읍니다.


記者. 이와노푸군은 어떳습니까.

이와노푸. 나는 個人農임으로 늘 꼬르포-즈에게 압박을 받어 심히 괴로운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든 관계로 생각할수록 로서아가 싫어졌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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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노푸. 우리 가족의 일상생활이란 그야말로 恐怖의 연속이라고 해도 좃습니다. 바람이 부러서 창이 덜걱거려도 께페우가 오지 않는가 하고 신경이 산란해 집니다.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도 군복을 입은 자가 오는 것을 먼데서 보면 우리들 잡으러 오나부다고 벌벌 떨고 있읍니다. 이것이 우리들 농민의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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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漢卿. 소聯學校에서는 東洋事情이라고 할는지 특히 日本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키고 있읍니까?


나하로푸. 4년제의 의무교육학교에서는 日本에 대해서 또는 그 他 다른 외국에 대해서 교육하지 않습니다. 지리는 배워 주나 극히 개략적입니다. 4년제 이상의 학교가 되면 일반정치학을 배워 줌으로 각국의 정치상태, 국내상태 등을 배워 주고 특히 日本에 대해서는 로시아가 본 日本의 나쁜 점에 주력해서 배워 줍니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농민은 매우 가난하다든가 상품이 없다든가 하는 것을 밤낮 들었든 까닭에 오늘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슴니다. 그랬으나 현재는<95> 그것이 틀린 것으로 알고 로시아의 교육은 진실하지 못하고 역선전하는 것이라고 알었읍니다. 학교는 상급이 됨에 따라서 정치교육이 진보되고 로시아대외정책이라는데 대해서 가르치고 있으나 제1상급의 대학교 혹은 사범학교에서는 그 경향이 만습니다. 또 그 교재로서는 주로 신문에서 산 재료를 취해서 배워 주긴 하지만 그 신문도 결국은 로시아 신문이 아니면 않되는 것이니까요.

高井. 외국신문은 전혀 볼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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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최근엔 蘇聯政府의 종교에 대한 정책도 엣날과 같이 심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어떠읍니까?

나하로푸. 정부는 법률로선 종교의 자유를 인증하면서도 무신론자, 무종교단체라는 것을 맨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박멸책을 강구하고 있읍니다.


權. 현재 소련민중은 종교에 대해서 어떤 感을 가지고 있읍니까? 우리도 들었지만 無神運動者들이 선전하기 위하여 농촌에 가면 농민들이 뫃여들어 때러서 골통을 깨고 도라 온다는데 사실입니까?


나하로푸. 혁명전에 교육을 바든 사람들은 전부 신을 믿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자들 중에도 맑씨즘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되는 땐 신앙을 가지는데요. 더구나 부모들의 영향이 있음으로 이런 사람들은 몰내 긔도를 하는 일이 있읍니다.



農民은 極度로 絶望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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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농민은 정말 행복합니까.


나하로푸. 개인경영으로선 재산을 빼앗깁니다. 꼴포-즈조직은 월급이지요만 이전은 勤農들에게 매우 환영을 받어답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선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前途의 희망이 보이지 않음으로 蘇聯의 농업자들은 매우 실망하고 있읍니다. 혁명이전 때가 살기 좋았다 해요.



朴得鉉. 그렇게 되면 현재의 농민생활과 혁명이전의 농민생활과의 차는 어떻읍니까?


나하로푸. 帝政時代엔 아주 큰 지주가 있었고 그밖게 농민이 그것과 비교된 때문에 어쩐지 재미없는 일이 많은 것 같았지만 그때도 현재의 농민과는 비교할 배가 아니지요.<98>

이와노프. 문제도 않된다고 하는데요.


나와로푸. 현재 농민과 帝政時代의 농민과를 비교할 만한 정확한 數字는 내가 여기서 말슴하지 못하지만 내 부모든지 또 형제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帝政時代 世界大戰 당시 이전은 그 지주들이 농민에게 그 토지를 난하줄 운동이 있어서 그래서 농민은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가지고 자기의 토지와 재산을 가질 遇境가 있도록 되었다고 합니다. 최근은 꼴푸즈가 되면선 자기의 재산, 자기의 토지라는 걸 가질 수 없고 또 정규수납의 규정이 있기 때문에 부담이 많어서 입는 것은 고사하고 빵문제 해결에도 곤란합니다.


高井. 거기에 내가 한 마디 말슴 더 하겠읍니다. 쏘베-트당국은 농민으로부터 것보리를 1키로 5카페-클을 수납해서 이것을 찟튼지 혹음 제분하든지 해서 1루-부르 카페클 내지 2루-부르 즉 30배 내지 40배의 값으로 팔어 버립니다. 찟는 데라든가 제분하는 비용을 합한다 치드래도 약 20배의 값이 되지요. 우유에 있어서도 1릿토르 15카페-크르를 수납하고 이것을 그대로 1루-부르 50카페클 즉 10배의 값으로 국영상점을 통해서 국민에게 판매하고 있읍니다. 그 差額이 전연방에 쌓이고 쌓여 蘇聯國家 豫算의 반액을 형성하고 있읍니다. 이것을 보드래도 꼴포-즈란 것이 조직적으로 농민을 착취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즉 농민은 정부에게 자기의 소득을 10배 많으면 30배 40배식 착취하고 있으니 쏘베-트 농민이 곤궁에 빠질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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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당신네들이 일상 먹는 음식을 거즛없이 말슴해 주시요. 그것으로 대체를 알 수 있으니까요.


이와노프. 아츰은 우유와 껌정팡... 우유를 먹을 만하면 상당한 셈죠. 점심은 감자얘요. 고기를 살 수 있으면 먹게 되지만 지금은 닭과 소를 먹이게 못하는 까닭에 소고기 같은 건 도모지 먹질 못해요. 지금은 그런 고기도 없이<99> 대체로 감자와 파를 한데 짓*서 가지고 가*쯔데쯔를 맨드러 먹지요. 거기에 쓰-프 이것도 감자와 카*쯔. 저녁은 차와 껌정빵, 연어같은 *을 먹을 때도 있지만.


權. 나는 1931년. 1932년에 우라지오 太平洋 勞働書記局에 있을 때의 일이지만 그때 *껌정빵이 없어졌단 이얘길 들었는데 아직 있읍니까.

이와노푸. 우리들의 상식 인데요.

나하로푸. 도회엔 한때 없어진 때가 있었을지 모르나 현재 극동에 있어서 蘇聯 농민의 긴요한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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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농민은 얼마나 세납을 부담합니까.


高井. 농민이 바치는 세금 중에서 제일 많은 것은 소득세입니다. 이것을 소득률에 따라 지불*니까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하로프. 그다음에 문화세 같은 것이 십수종이나 됨니다.

高井. 그 밖에 보험료가 있읍니다.

나하로프. 세금 외에도 여러가지 돈을 많이 냄니다. 먼저 의무적으로 채권을 사야 됨니다. 그밖에 스페인 전쟁 때문에 자기들이 동지를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사변 때문에 곤란을 받고 있는 支那의 자제들을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혹은 각국 혁명 때문에 타국에 있는 사람들을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여간 많은 것이 아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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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 농민들은 현정부의 정책에 대하야 만족*하는 모양이지요.


나하로프. 만족이란 蘇聯에는 없읍니다. 농민들은 결코 만족하여 있지 안슴니다. 혁명이전에는 농촌에 *는 빈민 라고 돈이 없기 때문에 해도 약 15퍼-센트밖에 안되고 그 외의 85퍼-센트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백퍼-센트가 다- 빈민이 되였읍니다. 물론 한사람도 신정부의 정책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읍니다. 다만 만족히다고 볼수 있는 것은 농촌에 있는 청년공산당원 뿐으로 그 사람들은 꼴포-즈의 근육노동에 참가할 필요가 없고 다만 선전이라든가 세금 독촉에<100> 한목 끼여서 일할 뿐인 고로 筋肉勞働을 안 하게되니깐 만족해 하지요.



都市의 勞働者 生活



金. 도시 勞働者들은 어떳슴니가.

高井. 도시 勞働者들의 생활이라고 말하면 勞働法에 따라서 勞働時間은 8시간이라고 제한되여 있기는 하지만 8시간의 勞働으로선 가족을 부양해 나갈 수가 없읍니다. 제한되여 있어도 가족들 때문에 3시간 내지 4시간을 연장하야 11시간 12시간의 勞働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記者. 월급이 아니고 일한 분량대로 주는군요.

이봐노프. 독신이래도 8시간 勞働이면 겨우 살어갈 정도입니다.



金. 그래도 勞働者가 농민보다 생활이 행복함니까.


이봐노프. 물론 勞働者는 농민보다 생활이 양호함니다. 그러나 혁명전에 勞働과는 비교도 될 수가 없읍니다. 싸베트에서 비교적 행복되게 뵈는 것은 勤務員입니다. 그 중에서도 학문이 있고 또 특수한 기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스탈린은 기술은 모든 것을 해결한다.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표어를 늘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 해당하는 기술자, 학문이 있는 사람들이 비교적 유복하게 생활하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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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로프. 물론 다 그러타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자에게만 조치요. 왜 그러냐하면 그들은 공산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좋은 지위도 어들 수 있고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가 있으니깐요. 그러니깐 그런 사람들은 공산주의는 아주 좋은 것인 줄 알지요. 그러고 일반 청년은 반동적으로 여기 대하야<101> 공산주의라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자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읍니다.



肅淸工作의 一例들 들음



記者. 여기서 문제을 박궈서 스탈린의 숙청공작에 대하야 즘 이야기합시다. 싸베트 건설공로자를 투옥한다거나 살해한다거나 하는 스탈린의 숙청공작에 대한 蘇聯내의 일반사회의 공기 같은 것은 어떳습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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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井. 당신도 3년 징역 살었다지요.(笑聲)

나하로프군이 처형 바덧다는데는 금일의 싸베트를 잘 나타내고 있는 무슨 사정이 이슬 듯하니 좀 들어봅시다.


나하로프. 생각해 내는 것만 해도 실증이 남니다만 나는 3년간의 强制勞働에 복역하였읍니다. 감옥에 드러 가기까지는 나는 어떤 상점 발송계에서 일을 보고 있었읍니다. 그 상점이라는 것은 지배인과 야체-카와 께페우의 3세력이 주장이 되여 있어서 내가 발송계니깐 물건을 어디로 보내라구 명령을 바더서 그대로 보낼야구 하면 금방 또 께페우에서 그 물건은 어디로 보내라구하는 주문이 드러옴니다. 나는 명령이니깐 께페우의 주문대로 했드니 처음 보낼 작정이든 그 곳에서는 물건이 안 오니깐 그것이 분실되였다구 말이 되는 것임니다.


高井. 께페우가 중간에서 주문을 했다는 것은 비밀이니깐 결국 죄는 발송계에 씨여지지요


나하로프. 물건이 니러졌으나 께페우는 재판에 부칠 수가 없으니깐 상점의 책임이 되여서 보내야 할 걸 보내지 않은 발송계의 책임이 되는 것임니다. 그 때문에 국가에 손해를 끼첫다는 의미로 재판에 걸닌 것입니다. 나는 국가의 유해자라구 하야 그때 처벌당한 것입니다.


記者. 재판 현황을 하나


나하로프. 내가 처형당한 재판소는 인민재판소였읍니다. 그 재판은<102> 재판장과 판사장 앞에 내가 서고 또 검사가 있읍니다. 거기다 또 배심원이라고 해서 농민출신이 한 사람, 勞働者출신이 한 사람, 이 밖에 여자 서기가 1명 이것으로 구성된 데서 재판을 바덧는데 별로 조사도 없어 그냥 인정서를 가지고 약간 물어 본 후 그냥 그 조서를 認定식히고 단 10분도 안돼서 징역 3년 强制勞働이 회부한다는 판결을 바든 것입니다. 그리고 3년의 强制勞働을 모스코바 마보루가에서 지냈읍니다.




犯罪, 乞食, 賣笑婦



記者. 그러면 이쯤에서 화제를 돌여서 이번에는 일반사회 사정을 들읍시다.



朴英熙. 싸베트에서 어떤 범죄가 제일 만습니까.


高井. 그것은 무엇무엇해도 지금 유행하고 있는 트로쯔키스트의 검거일 걸요.(笑聲)

나하로프. 범죄라고 하기엔 안됐지만 국가에 손해를 준다든가 혹은 국가가 원치 안는 자는 다- 싸베트의 범죄자로서 트로쯔키스트의 명목으로 검거당하는 것이 제일 만슴니다. 그 다음이 公金消費입니다. 그밖에는 뭐 다 그러치요. 살인은 도회에 많고 절도 같은 것은 농촌에 많은 것같이 보힘니다.


高井. 그것은 농촌이 얼마나 貧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暫間 소개함니다만 범죄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싸베트에서 제일 많은 범죄는 지금 유행하고 있는 트로키스트라고 생각함니다. 1937년 1월부터 38년 5월까지 그 명목 하에 검거당한 인수가 전부 2백60만9천인이나 됨니다. 그리고 本年度 內務人民委員部豫算의 강제노역소 경비를 정하는 기초로 되여였는 정부측의 자료에 의하면 강제노역소 재감자 수가 6백11만2천4백3십2인 약 1천만인입니다. 이중의 대부분을 정부측에서 소위 트로쯔키스트라고 보는 자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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貧弱한 民衆娛樂



金. 蘇聯의 민중오락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이와노. 도시에는 여러 가지 있읍니다마늘 우리 농촌에는 手풍금에 맟어 딴스를 하는 것쯤 한 정도이고 혹 휴일에는 술도 먹습니다.

나하로. 다른 것은 없어도 술만은 잘 공급하여 줍니다. 따라서 농촌의 오락으로서는 딴스와 술의 정도입니다.

權. 우리들이 로시아에 있을 때의 영화는 5箇年計劃의 선전영화가 대부분이고 다음은 모다 아메리카의 희극 같은 것이였는데.

나하로. 공개영화는 이전에는 獨逸 것도 있는 모양이였으나 지금은 주로 아메리카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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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者. 일본에 물자가 많은데는 저 三等大將 류시코프도 놀난 모양인데 대체 로시아의 현상은 어떠하십니가.


나하로프. 蘇聯의 물자란 대체 빈약합니다. 있기는 있드래도 불필요한 것이 많고 필요한 것은 적습니다. 워드카 같은 것이 많지요. 그러나 팡 같은 것은 적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데파-트를 구경하였는데 그 데파-트 한 집의 상품만 해도 하바롬스크全市에 있는 상품보다 아마 더 많고 민중이 즐겨할 것도 더 많으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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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得鉉. 蘇聯의 兵役은 自由兵役입니까. 强制兵役입니가?


나하로프. 蘇聯의 兵役은 형식으로는 自由兵役이여서 징병한다 하드래도 徵兵檢場에 査가면 나도 그랬지만 징병관이 「당신은 兵役에 종사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라고 하는데 그 徵兵官의 골 속에는 「兵役을 기피하는 者 國賊이다.」라고 하는 큰 글자가 씨어저 있읍니다. 그것을 보고는 모다들 자진하여 지원합니다.(笑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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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者. 日本에 와저 제일 감탄된 것이 무었입니가. 어데 간단히 대답하여 보시요.


이하노프. 제일 감탄한 것은 전쟁 중인데도 극히 평온한 것 그리고 日本은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물자가 없다는 것을 蘇聯에서 들었고 로시아는 물자가 아주 풍부하다고 하는 것이 전혀 그 반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日本 사람들은 퍽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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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모스크바



[ ..... 미국으로 가게 하여 달라 .......

...... 길가에서 기진하여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렇게 굶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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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정치이념이 온축된 《일민주의》의 내용은 4월 20일 저녁에 ‘일민주의 정신과 민족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서울중앙방송국의 방송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다음과 같은 서두는 이승만의 일민주의가 절박한 공산주의 비판 이론으로 구상되었음을 말해 준다.



“세계 모든 나라의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자는 현재 생존의 위기를 당하지 않은 나라나 민족이 없는 터이니, 이 이유는 즉 공산당 문제입니다. 공산주의는 본래 빈천한 사람들을 부귀한 사람들과 동등으로 살게 만들자는 주의라 할 것인데, 이 주의가 러시아에서 크게 발전된 이유는 러시아 제정(帝政)시대에 전제정치가 세계에서 가장 심하였던 것이므로 맑스주의를 흡수한 레닌(Vladimir I. Lenin)의 대혁명이 성공되어 러시아 황실을 다 전멸시켜 세계에 참혹한 공산혁명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



이승만은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경험했던 일을 보기로 들면서 소련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1933년에 국제연맹 회의가 열리는 제네바에 갔던 이승만이 시베리아의 한인지도자들을 만날 목적으로 모스크바까지 갔다가 입국을 거부당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2006년 8월호, <레만湖에서 만난 프란체스카> 참조).


모스크바 방문경험 보기로 蘇聯의 실상 설명



“빈민들은 부민(富民)을 타도해야 산다, 무식자는 유식계급을 몰락시켜야 산다, 상놈은 양반을 없애야 산다, 노동자는 재벌가를 정복해야 산다, 농민은 지주를 박멸하여야 산다, 이러한 것으로 언론과 서류를 세계에 전파하고 세포조직을 아니 둔 곳이 없게 되었으니, 영미 등 부강한 나라나 폴란드와 헝가리 같은 빈약한 나라에까지 그 세력이 뿌리를 박게 되어, 사람마다 생각하기를 러시아공산혁명으로 나라도 부강하고 백성들은 풍족하게 자유로 살 수 있는 극락세계로 알 만큼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러시아의 민중 같이 빈곤하고 압박받는 인민은 더 없을 것이니, 내가 13년 전 모스크바에 있을 때에 여관 사무원인 독일인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 비밀히 말하기를 매달 미화 8원씩 받아 가지고 일을 보라 하니 살 수 없는 것을 간신히 지낸다 하며 자기의 길을 열어서 미국으로 가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들었으며,


기차에서 미국인 몇 사람이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가 기차가 러시아 국경을 넘어온 뒤에는 이 사람들이 비로소 숨을 쉬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러시아 내지에 있던 곳을 몰래 들어갔다가 길가에서 기진하여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렇게 굶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니, 이것이 오늘 공산당 사람들이 자랑하는 러시아 극락지의 실정입니다. …


거짓 선전에 빠져서 남의 부속품인 노예가 되거나 공산당과 싸워서 민주국의 자유 복락을 누리게 되거나 이 두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해야만 될 것이니, 이외에 다른 것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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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109.주한미군의 철수와 국회 프락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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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 재임 중 국회는 지주 출신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박사가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장관에 임명해 농지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는 점은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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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전쟁 전에 분배가 단행될 수 있었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에 농지의 상당 부분이 분배되었다는 사실은 부인되기 어려울 것 같다. 문제는 어떻게 관련법규가 정비되기도 전에 정책이 먼저 시행되는 일이 발생했는가이다. 정상적인 근대국가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1950년 봄 한국에서 발생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러한 헤프닝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관부처의 행정적 판단과 李承晩의 독려가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1949년 6월 21일 우여곡절 끝에 농지개혁법(당초법안)을 공포하지만, 그 법안은 내용상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곧 이어 국회에서 개정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행정부의 관련부처에서는 개정안의 국회통과가 시간 문제일 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판단 아래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마련하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세부규칙들은 형식상 공포되지 않았을 뿐 내부적으로는 이미 분배 시행 훨씬 전인 1949년 후반에 마련되어 있었다. 1950년에 들어서자마자 농지개혁 시행에 관한 통첩뿐 아니라 그에 필요한 각종 용지 등이 일선 행정관서에 보내질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김성호 외,『농지개혁사연구』, 서울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pp. 648, 998~999)



주무부서인 농림부로서도 농지개혁 사업이 순조롭게 추진되려면 농지분배가 늦어도 보리수확 및 모내기 작업이 시작되는 6월 이전에 끝마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농민들이 곧 누구의 소유가 될지도 모를 농지에 파종하려 들지 않아 올 한 해 농사가 망쳐질 우려가 있었다. 또한 농림부는 농민들에게 서둘러 농지를 분배하고 그들로부터 하곡을 대상으로 상환을 받아야 한편으로는 곧 닥쳐올 지주들에 대한 보상에 충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식량수급과 관련하여 중요한 행정수단인 양곡수집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이러한 관련 부서의 과잉신속을 부추긴 것은 李承晩의 독려였다. 당시 李承晩이 농지분배를 조속히 시행토록 재촉한 증거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는 1950년 2월 22일에 있은「서산군 농지개혁 사무 주무자회의 서류」와 1950년 4월 25일 농림부에서 작성한 「농지개혁지침」의 해당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농지개혁 사무는…예산의 불성립과 지방기구 및 각급 농지위원회 미구성으로 천연 중이었던 바 대통령각하께서는 이에 대하여 각별히 진념하시어 작년 12월 13일 국무회의에서 특별 교시로 금년 춘경기 이전에 완수하게 하라는 분부가 있었고 또 1월 17일에는 국회의장에게 공한을 보내시어 농지개혁관계 추가예산안을 우선 상정케 하라 하였으며…사무추진에 적극 매진함을 요함(「서산군 농지개혁사무 주무자회의 서류」, 김성호 외,「농지개혁사연구」, 서울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p.936에서 재인용)



춘경기(春耕期)가 촉박하였으므로 추진상 불소(不小)한 곤란이 유(有)하였으나,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는 대통령각하의 유시를 받들어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실행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제1단계로서는 소작인에게 파종기전, 즉 4월 10일까지 농지분배 예정통지서를 교부하여 장차 자기 농지가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안심하고 파종하라는 것이다.(「농지개혁지침」4쪽, 김성호외, 위의 책 p603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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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대통령과 농지개혁 3

한국전쟁 전에 농지의 상당부분이 분배되었다
김일영 성균관대학교 교수. 정치학







1946.7. 미군정부 여론조사


[ ..... 지주의 소유토지면적을 제한하고 나머지 토지는 정부가 몰수 2,935 (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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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의원 설립을 앞두고 7월에 미군정부는 여론조사 실시 이래 가장 큰 규모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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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한국정부 수립 후 조선인 대지주 토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1. 현소유자의 소유로 인정 960(11%)

2. 지주의 소유토지면적을 제한하고, 나머지 토지는 적당한 가격으로 정부에 매도 4,130(47%)

3. 지주의 소유토지면적을 제한하고 나머지 토지는 정부가 몰수 2,935(35%)

4. 모르겠다 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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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8.



軍政廳輿論局, 朝鮮國民이 어떠한 종류의 政府를 요망하는지 여론을 조사


동아일보 1946년 0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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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4) 귀하는 조선정부가 개인의 권리의 자유 시민의 의무 정부의 책임과 구조 등을 규정한 성문법에 의거하여야겠다고 생각합니까?


(가) 예 7,356인(87%)

(나) 아니오 242(3%)

(다) 모릅니다 853(10%)


(問) 5) 만일 예라면 이 헌법작성 시기는 언제야 하겠습니까?


(가) 只今 1,857인(17%)

(나) 전조선인이 통일된 때 5,222인(71%)

(다) 모릅니다 269인(2%)


(問) 6) 이 헌법은 何者가 작성할 것입니까?


(가) 민선헌법회의 5,907인(70%)

(나) 중요정당이 선출한 위원회 1,134인(13%)

(다) 미소공위가 선출한 헌법위원회 610인(7%)

(라) 미군정이 선출한 헌법위원회 159인(2%)

(마) 미소공위 145인(2%)

(바) 미국정부 49인(1%)

(사) 모릅니다 447인(5%)


(問) 7) 조선의 최고법이 되기 전에 이 헌법은 누가 통과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합니까?


(가) 이 헌법을 작성하는 단체 926인(2%)

(나) 조선인민 6,785인(80%)

(다) 미소공위 239인(3%)

(라) 기타 155인(2%)

(마) 모릅니다 347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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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7.16. 민전 등



[ ...... 적산은 어디까지나 조선인민의 것이므로 임정 수립후에 인민대중의 의사에 쫓아 처리해야만 될 것 ........ ]



민전과 인민공화당, 적산불하 반대 담화



경향신문 1947년 07월 17일, 18일




남조선과도정부에서 적산불하에 관한 세칙이 발표된데 대하여 16일 민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반대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적산은 어디까지나 조선인민의 것이므로 임정 수립후에 인민대중의 의사에 쫓아 처리해야만 될 것을 재강조하며 이 법령의 즉시 철회를 주장한다.”


그리고 勤民黨 全評 女盟 基民 民愛 등 각 단체에서도 동일한 의견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 人民共和黨 聲明

“적산불하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임정수립 후에 국가경제 재건계획에 의하여 인민의 이익에 적합되도록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略) 적산불하에 대한 세칙이 발표되자 일반사회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데 전재동포원호회의 중앙본부에서는 적산불하는 임시정부수립 후에 할 것이지 지금에 불하를 하면 더욱 혼란을 일으킬 뿐”이란 의미의 적산불하 반대 담화를 발표하였다.








1948.12. 조봉암



[ ...... 形式만은 無料로 준다는 것이나 現物로 더 걷어가는 實情에 있으니 結局 農民들은 좋와 안는다. ....... ]




남조선민보


米糓買上은 樂觀

曺農林長官壯言


1948년 12월 29일


【開城廿七日發合同】 農林長官 曹奉岩氏는 지난 廿五日 開城方面 米糓買上 督勱次 來到하였는데 記者와 會見하고 다음과 같은 一問一答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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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北韓의 土地改革과 南韓의 改革과는 어떠케 다르다고 보는가


答 北韓은 「볼세뷔키」方法이고 南韓은 民主主義方法이다. 北韓처럼 無償分配라해도 農民들은 고마워하지 안을 것이다. 왜냐하면 形式만은 無料로 준다는 것이나 現物로 더 걷어가는 實情에 있으니 結局 農民들은 좋와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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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9.20. 스탈린 비밀지령



[ ......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라는 9월 20일 비밀지령 ....... ]



[ ..... 한반도가 외국의 수중에 들어가 소련을 공격하는 발판이 돼서는 안 된다 .......


...... ‘한반도 전체에 대한 절반의 통치보다는 절반에 대한 완전한 통치가 좋다’ ........ ]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 ⑨ 1차 전문가 좌담 <上>


200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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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스탈린은 세계적 관점에서 전략적으로 구상하는 인물로 그의 주적(主敵)은 미국이었다. 소련의 한국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비밀지령인데, 그 지령이 나온 배경도 미국과의 대결관계였다. 특히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스탈린은 미국을 몹시 경계했다. 그는 일본 점령 공동 참여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는 8월 15일 “일본 홋카이도 북반부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소련의 여론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너희가 총을 가지고 들어온 조선은 갈라주지만, 일본은 너희 군사가 한 명도 상륙하지 않았는데 왜 주느냐”며 반대했다.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라는 9월 20일 비밀지령은 미국과의 대립관계 때문에 내렸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이승만이 반소적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스탈린이 이런 지령을 내렸다고 보는데 그건 지엽적인 문제다.


▽전 = 1945년 6월 소련 외무성에서 작성한 문서는 한반도가 외국의 수중에 들어가 소련을 공격하는 발판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 소련은 일본을 폐허화하려고 했다.


▽전 = 소련은 전후 일본 관리에 미국과 동일지분으로 참여하고자 했으나 미국은 “절대 안 된다”고 버텼다. 그러자 소련은 점령지역만이라도 확실히 장악하려고 했다. 즉, 전후 일본관리에 대한 참여가 봉쇄되면서 북한만이라도 세력권으로 굳히려 한 것이 9월 20일 비밀지령을 내린 이유라고 생각한다.


▽란코프 = 말씀하신 대로 (소련으로서는) 미국정책이 가장 중요했다. 당시 소련이 아주 무서워했던 것은 일본의 재등장이었다. 이런 일본 공포로 인해 1950년대 초까지 신경을 썼다. 소련은 민주화된 일본도 위협으로 여겼다. 소련에 있어서 한반도는 미국과 관계가 나빠졌을 때 일본의 공격길을 막을 수 있는 전략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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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코프= 소련은 1946년 봄까지 미국과 어떤 협약도 필요 없었다. 소련이 처음부터 맞출 수 없는 조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운 것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절반의 통치보다는 절반에 대한 완전한 통치가 좋다’는 사고변화 때문이었다.


▽전 = 9월 20일 비밀지령 이후 10월에 열린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행한 치스차코프 대장의 연설은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세우라는 지시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북한을 독자적인 정치경제적 단위로 분리해서 북한의 행정과 경제를 관리할 최고기구를 만들고 그 산하에 10개의 중앙행정부서를 만들어 소련점령군 사령부가 지휘하는 시스템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9월 20일 비밀지령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10월의 상황 진척은 (북한에) 독자적 중앙집권적 국가기구를 만들겠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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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nga.com/fbin/output?n=200410170218








1945.9.20 조선공산당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



[ ..... 금일 조선은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의 계단을 .......

..... 우리는 토지문제를 혁명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


...... 농작자의 로력과 가족의 인구수 비례에 의하여 분배 ...... 전토지는 국유화 ........


...... 토지문제를 용감히 대담스럽게 혁명적으로 해결함으로써 광범한 농민계급을 자기의 동맹자로 전취하는 계급만이 혁명의 영도권을 ........ ]




[ ......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지 송진우와 김성수를 중심한 한국민주당은 지주와 자본계급의 이익을 대표한 반동적 정당이다. ....... ]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 (8월 테제)


- 해방 후 8월 20일 발표하고 9월 20일 수정하여 9월 25일 출판한 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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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선 혁명의 현단계



금일 조선은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의 계단을 걸어가고 있나니 민족적 완전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이 가장 중요하고 중심되는 과업으로 서 있다. 즉 다시 말하면 일본의 세력을 완전히 조선으로부터 구축하는 동시에 모든 외래자본에 의한 세력권 결정과 식민지화정책을 절대 반대하고 근로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정권을 내세우는 문제와 동시에 토지문제의 해결이다. 우리 조선사회제도로부터 전자본주의적 봉건적 잔재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자유발전의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우리는 토지문제를 혁명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본제국주의자와 민족적 반역자와 대지주의 토지를 보상을 주지 않고 몰수하여 이것을 토지 없는 또는 적게 가진 농민에게 분배할 것이오 토지혁명의 진행과정에 있어서 조선인 중소지주의 토지에 대하여서는 자기경작토지 이외의 것은 몰수하여 이것을 농작자의 로력과 가족의 인구수 비례에 의하여 분배할 것이오 조선의 전토지는 국유화한다는 것이오 국유화가 실현되기 전에는 농민위원회 인민위원회가 이것을(몰수한 토지)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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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농민 도시소시민과 인텔리겐챠는 조선혁명의 현단계인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혁명에 있어서 토지문제를 용감히 대담스럽게 혁명적으로 해결함으로써 광범한 농민계급을 자기의 동맹자로 전취하는 계급만이 혁명의 영도권을 잡을 수 있다. 그것은 곧 조선에 있어서 가장 혁명적인 조선푸로레타리아트만이 이 혁명의 영도자가 되는 것이다. 금일에 있어서 그들 노동자 농민은 혁명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동시에 다른 편으로 지주 고리대금업자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지는 종래의 친일적 태도를 어떠한 희생을 아끼지 않고서라도 이것을 감추고 새로운 캄푸라지(보호색)을 쓰고 나선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 붕괴와 퇴각과 동시에 새로 나타나는 외국세력을 영접하고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가면서라도 그들 자체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겠다는 배짱이다. 민족급진주의자 민족개량주의자 사회개량주의자(계급운동을 포기한 일파) 사회파시스트(일본제국주의자와 협력하는 변절자 일파)들은 「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간판을 들고 나서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과거 파벌운동을 그대로 연장하면서 노동자 농민 소부르조아지의 진보적 혁명적 대중운동의 선두에 나서고 지도자의 역할을 놀 것이라는 것이다.


튼튼한 볼세비키적 공산당의 결여는 저 정치적 투기업자들로 하여금 조선인민운동의 지도권을 장악해볼까 하는 일누시(환상)를 가지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혁명적」 언사를 운운하는 사이비혁명가와의 대중적 투쟁의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옳은 혁명적 정치 로선과 배치되는 경향과 투쟁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조선의 지주와 대자본가들이 주장하는 로선이니 이것은 우리의 혁명적 로선과 대립되고 있다. 그것은 형식적 민주주의국가의 건설로써 그들 지주와 대자본가의 독재하에 그들의 이익을 옹호존중하는 정권수립의 기도이다. 이것은 해외에 있는 망명정부와 결탁하여 가지고 저 미국식의 데모크라씨적 사회제도건설을 최고리상으로 삼는다.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지 송진우와 김성수를 중심한 한국민주당은 지주와 자본계급의 이익을 대표한 반동적 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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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 조선에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당을 건설하여야 할 것인가? 푸로레타리아트의 전위는 볼쉐비키당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당은 노동계급의 한 부분이며 한 부대이지만 그것은 보통부대가 아니고 특별한 정예부대이다. 레닌 동무는 당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사회활동에 대한 지식 사회발전 법칙과 계급투쟁 법칙의 이론으로 무장하여 노동계급을 인도하며 그 투쟁을 지도하기에 유능한 노동계급의 선봉대이다.』


이러한 당의 과업은 근로대중을 당의 수준에까지 올리며 자기 전당원으로 하여금 의무적인 군대식적 규률을 가지게 하여야 한다. 당은 최고지도자로써 푸로레타리아트의 모든 단체를 지도하며 수백만의 근로대중과 련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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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만국푸로레타리아트의 조국 쎄쎄쎄르 만세 !

일. 세계혁명운동의 수령 스탈린동무 만세 !








1945.10.3. 해방일보



[ ......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과정에 있어서 전토지를 國有化하고 이것을 농민의 노력과 그 가족수에 비례해서 재분배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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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土地는 農民에 適正分配-공산당의 토지문제에 대한 결의-〉에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과정에 있어서 전토지를 國有化하고 이것을 농민의 노력과 그 가족수에 비례해서 재분배함으로써 완전 해결되는 것이다”(〈해방일보〉 1945.10.3)라 했다. 이것이 좌익계 문서에서 토지개혁이 곧 ‘國有化’임을 노출해 버린 유일의 기록이고, 여타의 경우는 모두 농민에게 ‘소유권’을 준다고 위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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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館論叢 第25輯 > 農地改革硏究 (金聖昊)







19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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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1945년 10월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통해 북한에 독자적인 정권을 확립하는 문제가 기정사실화되고 이를 지도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김일성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


▽이=그 무렵부터는 상황이 착착 맞아떨어진다.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끝난 10월 11일 미군연락장교가 소환되고, 13일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결성된다. 그리고 14일 김일성이 평양에서 대중 앞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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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0.13. 김일성



[ ...... 볼셰비키적 지도하에서 우리의 볼셰비키진영을 일층 확대, 강화함으로써 목전에 다가온 모든 정책을 ....... ]



[ ..... 5도연합 회의가 박헌영 동지의 정당한 노선을 밟아 개최되는 데 대하여

전세계 무산계급의 조국인 소연방 스탈린 대원수에게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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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문이 해방일보 1945년 11월 5일자 「정치노선 조직확대 강화에 관한 결정서」로 게재됐는데, 이것은 1945년 10월 13일 열성자대회에서 29개 항이 채택된 겁니다. 여기 14항에 “대회는 중앙에 충실히 복종할 것을 맹세한다”고 나와 있는데, 중앙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었습니다. 이 결의서에 따라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보낸 대회에서 채택한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금번의 세계대전에서 스탈린 대원수의 세계 평화의 해방을 위한 참으로 위대한 정책하에 시도된 영웅적 투쟁에 의하여 모든 유리한 조건이 실현된 조선에서 5도연합 회의가 박헌영 동지의 정당한 노선을 밟아 개최되는 데 대하여 전세계 무산계급의 조국인 소연방 스탈린 대원수에게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조선 무산자계급의 영도자 박헌영 동지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동지의 정당한 볼셰비키적 지도하에서 우리의 볼셰비키진영을 일층 확대, 강화함으로써 목전에 다가온 모든 정책을 기대하여 동지의 건강을 기원한다.


조선공산당 만세! 조선인민공화국 만세! 전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영수, 스탈린 동지 만세! 조선무산자계급 영수, 박헌영 동지 만세!


1945년 10월 13일”



이런 내용의 편지문도 보냈어요. 이 내용이 임은의 일어판에도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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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9.25. 김일성



[ ...... 지난 1년 동안 붉은 군대가 준비하고 추진한 민주개혁의 성과를 보고 .......


...... 진정한 해방자인 붉은 군대에 대한 감사의 뜻을 높여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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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비밀’이라는 도장이 찍힌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결정집에는 김일성이 1946년 9월25일 열린 북로당 중앙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지난 1년 동안 붉은 군대가 준비하고 추진한 민주개혁의 성과를 보고 북조선인민들은 붉은 군대에 대한 인식을 깊게 했다. 우리 인민들은 진정한 해방자인 붉은 군대에 대한 감사의 뜻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개혁 프로그램 등 지난 1년 동안 북조선에서 진행된 모든 정치프로그램이 모두 소련군정에 의해 기획되고 추진됐음을 명쾌하게 밝히는 문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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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X파일: 김일성 낙점, 북한정권 탄생의 비화

인보길
2011-10-25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1/10/25/20111025000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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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0.31. 뉴욕타임즈 사설



[ ......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교섭을 그의 점령지대에 소련의 확고한 정권을 수립하고 미국점령지대까지도 접수할 용의를 한 조선인 괴뢰부대를 창설할 때까지 정돈시키었다. ....... ]



「뉴욕타임즈」, 소련의 조선문제에 대한 조치를 논평하는 사설게재



경향신문 1947년 11월 01일



[뉴욕31日發UP 朝鮮] 뉴욕타임즈紙는 사설에서 UN에서의 소련의 조선문제에 관한 조치를 중요시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UN에서의 소련의 조선문제에 관한 공작은 특히 중요시된다. 이는 전술 채용의 연습인 것이며 만약 현재에 있어 성공한다면 런던에서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관한 4상회의에서 취할 소련의 전략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조선에서의 소련의 방해적 전술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교섭을 그의 점령지대에 소련의 확고한 정권을 수립하고 미국점령지대까지도 접수할 용의를 한 조선인 괴뢰부대를 창설할 때까지 정돈시키었다. 소련의 제안에 의하여 미소 군대의 즉시 철퇴를 실시한다면 조선은 완전히 적군에게 정복을 당하게 될 것이다.”







1949.4.



[ ...... 말이 유상분배지 실은 무상분배의 가면을 쓴 다른 지역의 그것보다도 훨씬 유리한 것임 ........ ]


[ ...... 상환액을 완납 ..... 임의로 농업에서 이탈하기로 되어 있으니 북한처럼 국가의 소작인과 같은 구속은 받지 않는다. ....... ]



[ ...... 농지를 상실한 지주로서 상업능력이 있는 이에게는 공업생산, 광산개발, 수산개발 등 근대산업에 우선 알선 ....... ]




<농지개혁의 근본이념:농림부 농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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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농지를 상실한 지주로서 상업능력이 있는 이에게는 공업생산, 광산개발, 수산개발 등 근대산업에 우선 알선케 하였으니 지주들로 하여금 가일층 진실한 인간적인 생활과 유효적절히 역할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것이니 소극적인 지주의 구제책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비약적인 발전에 길을 열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老·幼·婦女子로서 농지상실로 인하여 그 생활방도가 難免한 지주에게는 생활비와 아동의 교육비로 農地代價보상금 외에 특별보조금을 지불할 것도 고려하고 있는 바이다.


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법안의 지주에 대한 지가보상은 평년작 주생산물·생산량의 15할로 결정되고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에게는 이보다도 낮게 12할 5푼의 상환율로써 매년 생산고의 2할 5푼 정도를 5년 간 年賦償還하기로 되었다. 말이 유상분배지 실은 무상분배의 가면을 쓴 다른 지역의 그것보다도 훨씬 유리한 것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더구나 소지주에게 대하여는 3할 정도 지가보상에 첨가케 하였으니 이 얼마나 상식적이고 온정적인 것인가?



또 교육재단에 있어서는 그 재정기초에 동요가 없게끔 특별취급을 하기로 하여 文敎발전에 지장이 없게 하였으며 篤農家를 고려하여 자작농지를 3정보까지 보유케 하였다.


농지의 분배를 받은 농민은 상환액을 완납하기까지에는 임의처분을 하지 못하나 그 이후나 일정한 수속을 밟아서 임의로 농업에서 이탈하기로 되어 있으니 북한처럼 국가의 소작인과 같은 구속은 받지 않는다. 물론 분배받은 농지를 소홀히 하여 경작에 무성의하거나 상환금·조세 등 농지에 따르는 당연한 부담을 태만히 하여 국민된 도의에 어그러질 때는 모처럼 분배받은 혜택을 상실할 것이니 농민은 생산증강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미 처분된 귀속농지에 있어서는 경지면적에 아무런 변동은 없으나 상환율에 있어서나 연한에 있어서는 동일히 취급하기로 되어 있다.


요컨대 남한 농지개혁의 중요한 특징은 종합적인 산업재건의 기초를 수립하려는 것과 지주의 민족자본과 그 역량을 건국경제에 유효 적절히 활용하려는 점, 지주에게는 15할을 보상하면서 대지주에 대한 체감율과 귀속농지 수익으로써 충당하여 농민의 상환율을 2할 5푼이나 싸게 해서 국가의 세농민에 대한 온정을 보인 것 등 그 特點이 다른 어느 지역에서 실시한 것보다도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또 본법의 국회통과에 際하여 소작권 박탈과 부재지주 농지의 매매금지 등 말썽 되던 농지개혁임시조치법의 삽입된 데 크나큰 이채를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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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4월 27일

주보 제6호, 3~8쪽

<농지개혁의 근본이념:농림부 농림국>










동아일보 1949.5.13.




[ ..... 농민에 대한 현물세는 2할7부인데 실제에 있어서 5할이상을 .......

...... 노동시간외에 강압적으로 매일 그 어떠한 집회에도 참석할 의무를 ....... ]




이북은 지옥


월남동포담



본적을 38이북 함남 북청군에 둔 염철 씨는 지난 4월 14일 당지를 출발하여 경기도 파주군을 거처 5월 6일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최근 이북의 실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이북에 있는 절대다수의 동포는 괴뢰독재정권에 신음하고 있다. 농민에 대한 현물세는 2할7부인데 실제에 있어서 5할이상을 빼앗기고 있다. 노동자는 8시간 노동제의 미명하에 노동시간외에 강압적으로 매일 그 어떠한 집회에도 참석할 의무를 지게 되어 있어 자유로운 시간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세금으로써 시민의 고혈을 착취하기 위하여 산업은 대소를 막론하고 등록제로 되어 있으며 막중한 세금에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러한 악정이 다수의 동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괴뢰정권을 좌우하는 계급의 야망인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는 부락은 홋수가 약백호나 되는데 강제로 징병간 청년이 다수에 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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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의 농지개혁이 북한보다 못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중국이나 북한에서 농민에게 분배된 토지는 곧 집단농장으로 바뀐다.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북한은 오늘날까지 만성적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비다.


대한민국 건국과 농지개혁, 한국전쟁이 전개된 과정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으로 땅을 갖게 된 수많은 자영농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또 그들의 교육열이 오늘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경제발전 기적을 만든 에너지의 원천이다. 위대한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 건국이야말로 우리 민족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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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은 우리 민족사 가장 큰 기적 … 진보도 인정해야”
[중앙일보] 입력 2013.04.10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가 보는 현대사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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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의미는….


“1950, 60년대 우리나라 토지 소유의 평등지수는 세계 1위였다. 그만큼 세계사로 봐도 가장 철저한 농지개혁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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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비해 한국의 농지개혁은 효과가 작았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농지개혁법은 농민에게 지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소출의 30%를 5년만 정부에 내면 소유권을 갖도록 했다. 한 해 10석이 나는 땅이라면 매년 3석씩 5년간 내라는 거다. 일제강점기 한 해 5석씩 소작료를 내던 농민이 3석씩 5년 동안만 내면 내 땅이 된다는데 누가 포기하겠는가. 지주들에게는 국채를 줬는데 전쟁 통에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그래서 지주들이 쫄딱 망했다.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집단농장을 만들면서 국유화했다. 그 결과는 모두 아는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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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인터뷰] 주대환 부회장 “죽산이 추진하고 인촌이 도운 농지개혁, 평등과 번영 이끌어”

조종엽 기자 2019-04-05









[ ...... 지주가 사전 방매한 토지의 가격이 법정 상환가격보다 높지 않음이 일반적 .......

..... 사전 방매도 결국 개혁의 강제성 때문인 만큼 크게 보아 농지개혁의 효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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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효과에 관해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비판적인 견해가 우세했습니다. 정부가 직접 수용하여 분배한 토지가 전체개혁 대상의 절반도 되지 않은 가운데, 많은 토지가 지주에 의해 은닉되거나 사전에 소작농에게 고가로 강제 처분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의 여러 구체적인 연구는 지주가 사전 방매한 토지의 가격이 법정 상환가격보다 높지 않음이 일반적이었으며, 또 대량의 사전 방매도 결국 개혁의 강제성 때문인 만큼 크게 보아 농지개혁의 효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장시원 교수의 논문, <농지개혁ㅡ지주제 해체와 자작농체제의 성립ㅡ>은 이러한 새로운 동향의 연구 성과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소멸하고 전 경지의 96%가 자작지로 바뀌었습니다. 농지개혁의 효과는 어느 정도 국가체제가 안정된 195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농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생산의욕으로 농업생산력이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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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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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0.5. 미군정청 법령 9호



[ ...... 군정청에서는 농민의 번영과 보호를 꾀하고자 최고 소작료를 전 수확의 3분지1로 제정 ....... ]



법령9호 공포


자유신문 1945년 10월 11일



군정청에서는 농민의 번영과 보호를 꾀하고자 최고 소작료를 전 수확의 3분지1로 제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5일밤 군정장관으로 발표된 법령에는 소작인과 지주간의 현존하는 계약과 협정이 개정되었다. 따라서 소작인이 지불할 최고소작료는 소작인이 경작한 토지의 총수확물의 3분지1로 협정되었다.
그러므로 토지에서 산출된 전수확의 3분지1 이상의 소작료에 대하여는 여하한 새로운 규정된 계약도 실시되지 못한다. 그럼으로 이 법령에 위반하여 작성된 계약도 소작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면 그 효력이 계속되고 지주가 법령에 위반할 때는 그 1할을 감한다.

그리고 지주는 재판후에 결정되는 이외에 현재의 소작관계를 해약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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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군정에서도 나중에 3.1제를 실시 .......

...... 농민들이 고마워했다. 농민들이 3.1제도 좋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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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제와 3.1제, 농민과 해방의 의미



프레시안 : 지방 상황을 조금 더 짚어보자. 소작료 문제에서도 적잖은 변화가 이뤄졌다.


서중석 : 앞에서, 많은 한국인이 해방의 뿌듯한 감격을 (본격적으로) 맛본 건 8월 16일부터 치안대가 각지에서 활동하는 걸 보면서였다고 말했다. (그에 못지않은 것이) 3.7제였는데, 이건 인민위원회가 활동할 무렵 실시됐다. 3.7제는 소작료를 소출의 3할로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인 대다수가 농민 아니었나. 3.7제가 실시되니까 농민들은 '이게 진짜 해방'이라고 느꼈다. '우리가 소작농으로 설움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 그렇게 힘들게 농사를 지어도 다 소작료로 빼앗기지 않았느냐. 그런데 7할을 우리가 차지하고 3할만 지주한테 주면 된다? 아, 이런 세상을 만나게 됐으니 이거야말로 해방된 세상 아니냐', 이런 기쁨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군정에서도 나중에 3.1제를 실시한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해방을 맞은 한국 농민들의 그 기쁨을 미국도 묵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인들이 스스로 누리고 있던 자유를 (미국이 아주) 묵살
2020-11-10 17: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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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 2020-11-10 17:55:39
[ ...... 미군정에서도 나중에 3.1제를 실시 .......

...... 농민들이 고마워했다. 농민들이 3.1제도 좋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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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제와 3.1제, 농민과 해방의 의미



프레시안 : 지방 상황을 조금 더 짚어보자. 소작료 문제에서도 적잖은 변화가 이뤄졌다.


서중석 : 앞에서, 많은 한국인이 해방의 뿌듯한 감격을 (본격적으로) 맛본 건 8월 16일부터 치안대가 각지에서 활동하는 걸 보면서였다고 말했다. (그에 못지않은 것이) 3.7제였는데, 이건 인민위원회가 활동할 무렵 실시됐다. 3.7제는 소작료를 소출의 3할로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인 대다수가 농민 아니었나. 3.7제가 실시되니까 농민들은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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